황푸하, 「불」

by 조지환

그것은 아마 곧 꺼질 듯한 불이라고 한다. 거의 다 타고 남은 장작 위에서 옅은 주황빛을 흘리면서, 그것은 고집스레 아른거린다. 골몰히, 노인이 저 불길을 바라본다. 도대체 누가 자기 안에서 간신히 스스로를 비추는 자그마한 불씨의 위태로운 생명에 관심을 두지 않을 만큼 무던할 수 있을까? 작사가에 대하여, 그것은 먹먹한 고요다. 어쩌면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소리를 낼 만큼 강한 바람이 단 한 줄기도 불지 않았던 까닭에 저 불씨가 살아남은 것일까? 아니면, 너무 오랫동안 바람이 불지 않은 까닭에 저 불씨가 죽어 갔던 것일까?) 그러나 연주자들에 대하여, 그것은 도리어 소란이다. 그것은 갈수록, 아니면 처음부터, 어지럽고 시끄럽다. 기실 드럼은 맨 처음 필인부터 조바심에 흥분해 있는 것 같지 않았던가? 마지막에 우리는 색소폰의 동요를 들을 것이다. 끝내 「불」은 절박하게, 갈급하게 시끄러워지는 듯 들린다. 마치 고요가 두려워 내쫓는 양.

그리하여 노래가 끝날 즈음 연주자들은 분명 강렬한 인상들을 찍어낼 것이고, 아주 역동적인 상을 그려낼 것이다. 그 상이란 꺼져가며 아른거리는 불꽃의 상이라기보다도 점차 산불처럼 커져가며 쉴 새 없이 혀를 낼름거리는 불꽃의 상이라고 적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노래 부르는 이에 대해서도 적어야 할 것이다. 가사에서의 적막과 연주자들의 요란 사이에서의 동요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노래 덕이다. 연주자들이 만드는 불꽃의 상을 채색하는 것도 그의 노래일 것이다. “언제부턴가 아직도”라고 노래할 때 그는 분명 동요와 혼란의 제스쳐를 그려 보이는 것만 같고, 자기 노래의 마지막 음절의 발음을 끊지 않으며 멜로디의 길이를 늘일 때에는 저 불꽃의 끈질긴 생명력의 심상을 재현하는 것 같다. 

 

황푸하는 이미 『두 얼굴』에서 엮인 이야기들에 대해 스스로 주석을 달았다. 「불」에 붙은 주석에 따르자면, 이 노래의 불꽃은 모세가 양무리를 치다 마주한 그 불꽃, 떨기나무 가지에서 타오르면서도 떨기나무를 태우지는 않는 바로 그 불꽃이다.

이 주석은 하나의 해설일까? 요컨대 「불」이라는 노래가 출애굽기 3장에 관한 진실을 전달하는 하나의 은유라고 할 때, 저 주석은 「불」이 성서적 진실의 매개로 기능하는 방식을 해설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라이너 노트 작가는 일종의 목회를 하고 있는 셈이겠다. 만약 목회자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 은유가 성서적 진실을 전달할 수 있는 까닭을 밝히고, 그 전달을 돕고, 은유의 매개적 기능에 참여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은유라고는 해도 지금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래고, 그런즉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상이며, 게다가 저 상은 그것을 해설하고 있다고 간주된 라이너 노트 작가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글로 쓰인 진실이 있고, 그 진실을 상징할 삽화로서의 노래가 있으며, 그 노래가 진실의 삽화라는 점을 해설하는 라이너 노트가 있다. 그러므로 노래를 개입시키는 『두 얼굴』의 삼항 구조는, 진실 자체로서의 말과 그 말을 옮겨 적은 문자, 그리고 문자의 해설로 이루어진 삼항 구조보다도 더욱 심원하게 상의 감각적 제시에 의존한다.

황푸하의 라이너 노트에서 해설된 것이 『두 얼굴』의 진실이고 저 앨범에 수록된 노래들의 그 진실을 청각적 삽화라고 쓰는 것은, 이 앨범이 8번 트랙 「두 얼굴」에서 명시적으로 제시될 두 입장 중 하나를 애초에 간취하고 있었다고 쓰는 것과 같다. 요컨대 미표현 상태의 진실이 있으며, 그 진실을 끄집어내고 외출시키는 심상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얼굴』은 애당초 모세와 아론 사이의 투쟁에 판가름을 낸 채 시작할 것이고, 진즉 끝난 투쟁을 앨범의 종막이 다가오기 직전 뒤늦게 모사하게 (그러니까, 형상화하게) 될 것이다. 노래들은, 청자의 상상 속에 하나의 상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그 스스로도 이미 상들이지 않은가? 모세는 상을 금지시키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모세와 아론』의 쇤베르크는 모세의 멜로디를 억제해야 했다.1 그러나 「불」에서는 슈프레히게장이 연출되지 않는다.

만약 라이너 노트와 노래들이 서로 대응한다고 보아야 한다면, (그리고 그렇기에 둘 모두가 성서를, 그것도 구약을 가리키고 있으며 라이너 노트가 노래들을 성서의 매개로 기능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보아야 한다면,) 이 앨범은 실상 모세와 아론 사이의 갈등 속에서 고심하는 앨범이라기보다도, 아론의 옆에서 구가하는 앨범이라고 해야 하겠다. “내가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다.” (출 32:18, 새번역.) 요컨대, “실재를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하는 예술가와 실재를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유가 사이의 투쟁”은 「불」에서부터 이미 승부가 나있었다고 해야 하겠다.

이것이 섣부른 일이라면, 그러니까 이 앨범 어딘가에서 아직 다 치러지지 않은 투쟁과 종식되지 않은 갈등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야 한다면, 「불」에서 재생되는 목소리가 모세의 목소리를 재현한다고,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모세의 목소리에 대응하기는 한다고 간주하는 일은 (적어도 당분간은) 유보하는 것이 좋겠다. 어쨌든 당장 첫 곡에 이미 모세가 도착해 있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아마도 그것이 우리가 이 앨범의 라이너 노트를 존중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만약 라이너 노트와 「불」이 서로 대응한다고 고집스레 신뢰한다면 그것은 금송아지 앞에서 난교하는 『모세와 아론』 2막 3장의 이스라엘인들 가운데에서 부름받는 모세를 지목하겠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자면,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노래와 라이너 노트 사이의 공간을 교란적인 반율법주의의 공간으로 전도시키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아마 일종의 반항이겠다.

  1. 아도르노는 『모세와 아론』의 슈프레히게장이 모세가 착수해야 하는 불가능한 소통의 방편이라고 쓴다. “쇤베르크[의 오페라]에서, 상에 대한 금지의 원칙을 대표하는[재현하는] 모세는 […] 노래하지 않으며, 그저 말한다. 성서의 이야기에 따르자면, 그가 구약의 금기를 극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실재로는 가능하지 않은 방식으로 소통하는 것뿐이다.” T. Adorno, Sacred Fragment: Schoenberg’s Moses un Aron; in Quasi una Fantasia, Translated by R. Livingstone, Verso, 1992, London, 23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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