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st : 2021 국내 베스트 앨범 10 by Yves

by Yves

 

이번에도 지난 한 해, 2021년의 대중음악을 조망하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우리 시대의 대중음악에는 수만 명의 아티스트와 그에 필적하는 수의 앨범이 있고, 헤아릴 수 없는 수의 기호와 취향이 존재합니다. 제가 절대적인 통찰력을 갖고 그 모두를 아우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제가 소개하는 10개의 별을 통해, 여러분도 직접,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별을 세어보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하는 소원을 담아봅니다. 이에, 소개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빛났던, 그 색이 특별한 별들입니다.

 

 

* 본고는 필진 Yves 개인의 2021년 결산으로서, 웹진 <온음>의 총결산과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 본고에서 소개되는 작품들은 모두 2020년 12월 1일과 2021년 11월 31일 사이에 발매되었습니다.

* 지난 2020년 결산과는 다르게, 2021년 결산부터는 정규 앨범―LP―만을 본 리스트에서 소개합니다. 부가적으로, 기억될 만한 EP를 두 장을 뽑아 따로 소개합니다.

* Honorable Mentions와 EPs는 아티스트명을 기준하여 가나다/알파벳 순으로 소개합니다. 또한, 리스트 내의 순위와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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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orable Mentions

 

김일두, 『새 계 절』, 두루미흥업, 2021.01

 

 

백예린, 『tellusboutyourself』, 블루바이닐, 2020.12

 

 

소음발광, 『기쁨, 꽃』, 오소리웍스, 2021.10

 

 

윤하, 『END THEORY』, 씨나인이엔티, 2021.11

 

 

GLOWCEAN, 『ESSENCE』, 라일, 2021.01

 

 

IU, 『LILAC』, EDAM 엔터, 2021.03

 

 

TRPP, 『TRPP』,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 20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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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s

 

해파리, 『Born By Gorgeousness』, 플립드코인뮤직, 2021.05

 

 

HEARTCORE, 『HEARTCORE』, Hi-Lite Records, 20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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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st

 

 

 

 

지난 한 해 한국에서 발매된 앨범들을 다루는 자리에서 SLANT의 『1집』을 소개하는 것이 의아할 수 있겠다. 그도 그럴 것이 『1집』은 Iron Lung Records를 통해서 발매된 하드코어 펑크―Punk―앨범이고, 『1집』이라는 타이틀 외에 이 앨범이 한국 앨범이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을 신호가 일절 없다―물론 살짝 곁두리로 나가면 있긴 하다. 지금에 와서는 다수의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1집』을 감상할 수 있고, 몇몇 트랙에 한해서 그들의 노랫말을 문자로써 찾아볼 수 있지만, 『1집』이 발매될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리의 청각을 통해 그들의 노랫말을 곱씹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심상을 들여다보고자 우리가 결착할 수 있는 지점은 트랙의 타이틀 밖에 없었다. 「Enemy」, 「Terminal」, 「Stagnation」, 「Violent Minds」 등의 표현과 ‘19세 이하 청취 불가’의 표시가 예증하듯 결정적으로 그들의 심상이 닿는 곳은 분노이고 감정의 폭발이다. 『1집』의 감상은 이 표식들로부터 출발하는 셈이다.

물론 이와 같은 감상의 출발은 하드코어 펑크의 규범에 가깝다. 『1집』이 그런 규범의 재현으로서 이야기될 수 있음이 분명해지는 지점은 SLANT의 연주다. 러닝 타임이 2분을 넘는 트랙이 「Casualty」 하나밖에 없을 정도로 이들의 연주는 전반적으로 매우 빠르고 강력하다. 드러머 Garrett의 연주는 D-Beat의 투박한 반복임과 동시에 확장이고, 세 명의 기타와 베이스에서 흘러나오는 흉포한 소리는 드럼에 부딪혀 강력하고 거친 파열을 일으킨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SLANT 고유의 심미성이겠지만 하드코어 펑크로서의 충실한 비전이기도 하겠다. 임예지의 가창 역시 그렇다.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알아듣기 힘든 것은 언제나 매한가지지만 그 가창에서 우리는 앞서 언급한 표식들을 가감 없이 재확인할 수 있다.

『1집』은 여러 측면에서 하드코어 펑크라는 장르의 매니악한 특성과 결부된 선택의 소산으로 보는 것이 옳다. 과격한 수준을 넘어 난폭하다고까지 보일 수 있는 연주와 정신없이 내지르는 가창은 그 자체로 하드코어 펑크의 중추적인 특질 중 하나가 되어 특정한 커뮤니티를 형성했고, 앨범을 생산하는 이들 역시 되도록 많은 이들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대중음악의 대원칙 대신 적은 수의 매니아를 공략하고 그들과 함께 공명하기를 선택했다. SLANT가 그 매니아를 찾아가기 위해 만국 공용어인 영어를 선택한 것도 그러한 맥락일 터다. SLANT를 두고 ‘한국에도 이런 아티스트가 있다’라는 말을 덧붙이기보다 우리의 대중음악에는 자신들의 음악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그리고 누구와 함께 살아 숨 쉬는지 잘 알고 있는 영리한 이들이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옳겠다. 『1집』은 많은 측면에서 그러한 선택의 성공적인 소산으로 볼 수 있겠다.

 

 

 

 

 

 

 

우리 시대의 한국 힙합에서 가장 뛰어난 테크니션 중 한 명인 Kid Milli와 다재다능한 프로듀서 dress의 만남은 지난 한 해 가장 화제를 끌어모았던 협업 중 하나였다. 물론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들의 첫 번째 결과물 『Cliché』에 그들만의 아주 독창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보이지는 않고, 더욱이 『Cliché』에는 Vince Staples나 Zack Sekoff의 그림자가 만든 대단한 히트곡―「WHY DO FUCKBOIS HANG OUT ON THE NET」 (2018)―도 없다. 하지만 이 나라의 모든 협업이 연금술에 가까운 무언가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coloringCYAN의 논지대로 우리가 앨범의 성격에 따라 각기 다른 기준을 통해 이야기를 이어가야 하듯이, 나 역시 『Cliché』가 1PD 1MC의 팀 아래에서 발매된 것에 주안점을 두어 이들이 적당한 시너지를 이루어냈는지 그 여부에 관해 초점을 맞출 생각이다.

가장 중요한 건 Kid Milli와 다양한 피처링 아티스트의 퍼포먼스에 따라 dress의 프로덕션이 결정되었다는 것이고, 또 이들이 서로 이물감 없이 하나의 트랙 안에서 공존한다는 점이겠다. 물론 레이브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V I S I O N 2021」과 「Bittersweet」은 『Cliché』의 초반부에 위치해 우리의 이목을 단숨에 집중시킬 수 있는 뱅어라는 점에서 특별할 수 있다. 그러나 Okasian의 등장을 기준으로 전후반부의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Bankroll」이나 Kid Milli가 차분하게 노래하는 「Citrus」, 그리고 끝없는잔향속에서우리는과 색다른 조화를 모색한 「Midnight Blue」와 변화무쌍한 전개가 돋보이는 「Cliché」의 프로덕션이야말로 이들이 실로 장기적인 계획을 그릴 만한 근거로서 기능하기 충분하다―나는 『Cliché』가 두 개의 트랙 리스트를 가진다는 사실이나 「Intro」가 통속적인 의미에서의 앨범 인트로가 아니라는 점이 감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생각하지 않는다.

Kid Milli는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새로운 시도가 갖는 위험성을 감수하거나 남용되는 매너리즘이라는 표현을 신경 쓰지 않겠다는 취지로 앨범의 타이틀을 『Cliché』로 정했음을 밝혔다. 내가 이해한 것이 올바르다면 본디 클리셰라는 표현은 규범과는 다르게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 낡아진 소재를 의미한다. 이에 따르면 Kid Milli와 dress가 담는 함의는 ‘일단 『Cliché』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라’는 주문일지도 모른다. 「Face & Mask」가 COVID-19에 관한 내용이라거나, 「Challenge」가 미디어와 결탁하는 음악 시장의 최신 유행을 단순히 비관하는 내용이라서 혹은 대다수 트랙에서 이제는 흔해진 장르 블랜딩의 시도를 꾀했기 때문에 『Cliché』가 아닌 셈이다. 『Cliché』는 안전주의와는 무관한 선택이고, 동시에 사케이즘이 가득 담긴 냉소적인 신호다. 나는 이 신호를 높게 산다. ‘명반이 아닌 하루 세 탕이 결국 꿈인 듯이’라는 가사가 가리키듯 Kid Milli는 ‘Show’는 하겠지만 ‘Prove’ 혹은 ‘Be proven’에는 크게 관심이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Cliché』는 도발이라기보다 건조한 관망이다.

 

 

 

 

 

 

 

앞서 Kid Milli와 dress의 『Cliché』가 이 시대 힙합 앨범과 음악 시장에 관한 클리셰에 가까운 반응들을 건조하게 관망하기 위해 기획된 협업 앨범이었다면, unofficialboyy와 HAIFHAIF의 합작 앨범 『그물, 덫, 발사대기, 포획』은 2000년대 중후반의 국내외 힙합 시장에서의 규범으로 여겨지던 요소들을 아주 충실하고 흥미롭게 재현한 협업 앨범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의 힙합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힙합의 영역으로 팝이 찾아가던 시절’이라 할 수 있겠다. Kanye West와 Pharrell Williams, Timbaland, 그리고 수많은 이들을 중심으로 한 2000년대 중후반 힙합의 동향은 시간이 지나 힙합이 힙합이 아니게 되어가는 과정에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고 힙합을 포함한 흑인 음악이 대중음악의 지형도 안에서 현재의 위치에 올라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unofficialboyy와 HAIFHAIF가 『그물, 덫, 발사대기, 포획』을 통해 그러한 변화를 한국에도 가져오고자 했다는 것이 아니라, 팝 랩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던 당시의 힙합을 그들의 방식대로 나름 훌륭하게 모사했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물, 덫, 발사대기, 포획』의 정말 많은 곳에서 그 시절의 향기가 느껴진다. 그 향기가 가장 진한 지점을 꼽는다면 나는 「돈내」와 「누가왔게」를 꼽는 편이다. 「돈내」의 리듬을 Beatbox Hellcat의 비트박스가 주도한다는 것만으로 이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지만, 거기에 덧붙여 발음을 의도적으로 변화시켜 운율과 그루브를 더하는 랩 역시나 그 시절의 G-Dragon를 보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한편 JJK가 참여한 「누가왔게」는 대중음악의 헤게모니가 힙합으로 향하게 된 시점의 재현처럼 느껴진다. 어떤 면에서는 T.I 등의 서던 힙합의 향취도 느껴지고 Justin Timberlake의 『FutureSex/LoveSounds』 (2006)의 트랙을 듣는 듯한 느낌마저 받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unofficialboyy pt.2」나 「대가리」, 그리고 캐치한 훅이 인상적인 「그물, 덫, 발사대기, 포획」도 아주 흥미로운 트랙일 수 있다. 이에 덧붙여 이들이 전부 각기 다른 스타일의 트랙이라는 것도 이들이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다.

unofficialboyy와 HAIFHAIF는 자신의 역할에 따라 2000년대 중후반의 힙합 아티스트가 된 양 랩을 하고 드럼머신으로 비트를 찍던 그 시절의 방법론을 충실히 재현하는데, 물론 『그물, 덫, 발사대기, 포획』은 unofficialboyy의 개인적인 일탈일 가능성이 크다. 동시에 그 시절의 방법론을 들고 오는 것이 어떤 전복적인 시도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까이꺼」를 재생하던 순간의 쾌감은 나름 특별하게 느껴지는데, 평범한 트랩 비트나, 무난한 기대주로서의 랩으로 앨범을 여는 것이 아니라 그 예상을 살짝 빗겨 가며 여유 있게 다른 방향의 재미를 선사하는 것이 많은 생각을 자아내게 했다. unofficialboyy의 그 다운 음악이 무엇인지 심도 있는 이해가 없더라도 『그물, 덫, 발사대기, 포획』이 주는 재미는 특기할 만하다. 새로운 세대의 아티스트가 과거의 방법론에 기대어 커리어의 돌파구를 모색한다는 것,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다.

 

 

 

 

 

 

 

박수진은 이랑의 『늑대가 나타났다』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욕망’ 혹은 ‘전하고자 하는 욕망’들과 다름없다”라는 표현을 썼다. 사실 이것은 단순히 『늑대가 나타났다』와 같은 속성을 지니는 앨범들에만 적용되는 수사는 아닐 것이다. 대중음악이라는 단어가 성립된 이래 많은 이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가사라는 방법을 통해 효율적으로 전달할 방법을 모색해왔고, 또 그런 가사에 어떠한 이야기가 숨어있음을 어필하며 그 자체로 어떠한 욕망을 표출해오곤 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늑대가 나타났다』에 서린 그 욕망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에는 다른 것이 숨어있을 터다. “아티스트로서의 책임 의식, 프라이드를 반영했다.” 이랑이 말하는 저 책임 의식과 프라이드, 저것은 필히 우리 시대의 포크 음악 중 그 일부가 사회정치적 맥락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 민중가요로써 그 역에 분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랑이 『늑대가 나타났다』에 담은 이야기는 나와 우리,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담은 회화나 마찬가지고 그 점과 선, 그리고 면의 집합체는 다시 우리에게 전해지고 공명하는 동안 2차원보다 더 높은 차원의 무언가가 된다. 아마 저들은 이 현상에 주목하는 것일 테다.

『늑대가 나타났다』의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개인의 이야기를 발판 삼아 이루어진다. 「잘 듣고 있어요」라는 말은 다름 아닌 타인이 이랑 본인에게 건네는 인사말에서 시작된 경청의 발로이고, 「환란의 세대」 역시 지극히 그녀의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트랙이다. 또한 「늑대가 나타났다」의 ‘내 친구들은 모두 가난합니다’라는 가사나, 「의식적으로 잠을 자야겠다」라고 말하는 주체는 모두 이랑 본인과 가까운 범위의 주변을 가리킨다. 중요한 건 이들이 확장되는 과정이다. “이 가난에 대해 생각해보세요”라는 가사로 대표되는 「늑대가 나타났다」의 이야기, 무슨 이유에서인지 서로 다른 말을 내뱉으며 소통과 단절을 오가는 「대화」 등, 이것은 박수진의 말대로 ‘전하고자 하는 욕망’과 결을 함께 할는지 모른다. 물론 곡이 쓰인 배경을 묻고 듣고 수용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대화」나 「잘 듣고 있어요」에서 목소리가 겹쳐지고 악기와 목소리가 만나며 제 박자를 찾아가는 모습, 「환란의 세대 (Choir Ver.)」에서의 코러스와 괴성 등의 요소들은 서정민갑의 표현대로 『늑대가 나타났다』가 다성―多聲―의 기록임을 명확하게 나타내는 표식으로서 기능한다. 이랑의 이야기는 그 표식을 통해 확장되는 셈이다.

이랑이 바라는 유일한 것은 여전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 『늑대가 나타났다』는 『신의 놀이』 (2016)와 아주 유리되지 않는 앨범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듣고 반응하고 있음을 알게 된 후 그것을 염두에 두고 『늑대가 나타났다』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늑대가 나타났다』는 단순히 연대와 화합을 추구했다는 점 이외에도 그녀의 디스코그래피에서 특별한 지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의 대중음악이 선율과 리듬, 가사와 참조로 이루어졌다 해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얼마나 미적으로 잘 얽혀있는지 그 여부이고 『늑대가 나타났다』에는 가사와 선율, 그리고 화성이 하나가 되어 울려 퍼질 수 있음이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늑대가 나타났다』는 정치적인 앨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충분히 미적으로도 정갈한 앨범이기도 하다. 나는 그것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가 마주하는 대중음악에서 장르가 구분되는 이유는 대중음악을 소개하는 이들의 편의에서 기인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아티스트의 주장―그들의 악풍과 기조, 자라온 환경과 그들이 속한 무대 등―때문인 것이 가장 크다. 하지만 여전히 그 구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이상하리만치 그 구분이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무용론이 청자 사이에서 대두하고 있다. 사실 나는 그 구분이 전혀 의미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중음악의 헤게모니를 뒤바꾸고자, 혹은 장르라는 이름 외에 보이지 않는 벽을 파훼하기 위한 시도는 각기 단위에서 꾸준히 있었던 일이지만 그 구획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데에 성공한 이들은 지극히 소수이기 때문이다―그 소수의 아티스트에게서 영향을 받았음이 그 시도의 성공과 직결됨은 아니겠다.

조율의 데뷔 앨범 『Earwitness』를 이야기하며 그녀가 발매했던 포크 EP 『보물선』 (2019)을 언급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나는 그런 작업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긴다. 실제로 『Earwitness』는 『보물선』과는 너무 다른 작업물이고, 조율이 주장하듯 그녀가 『보물선』을 포크 EP로서 제작한 것은 그저 그것을 수단으로써 이용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녀가 『Earwitness』를 통해 포크와 앰비언트 사이의 간극을 대단히 좁히고자 노력했던 것도 아니다. 그녀가 “소리들 사이에 위계를 두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던 것도 그런 의미에서 출발하는 것일는지 모른다. 그녀의 음악에서 필요한 소리는 다른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소리일 뿐이다. 그 소리는 자신의 성대에서 나올 수도, 정보의 바다에서, 혹은 악기에서 나올 수도 있으며, 녹음기에 입력된 것이 출력된 결과물일 수도 있다. 나는 그들이 하나의 트랙 안에서 위치하고, 그 트랙들이 모여 하나의 정제된 레코드의 형태로 탄생할 수 있음을 표현했다는 점을 높게 산다.

『Earwitness』는 어떤 지점에서는 앰비언트처럼, 또 다른 어떤 지점에서는 구체 음악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말 많은 이들의 이름이 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Oneohtrix Point Never, Iannis Xenakis, Claude Debussy, Brian Eno. 이들의 음악이 그렇듯 『Earwitness』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한 심상이 아니라 하나의 소리가 다음에 등장할 소리와 균형을 이루며 하나의 트랙을 완성하는 현상일 테다. 노이즈, 글리치, 기타 소리, 무언가가 달그락거리는 소리, 목소리 등은 저마다의 형태를 온전히 간직한 채 그저 흐른다. 굳이 내가 개개의 트랙에 관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혹은 어떤 감상을 불러왔는지 그 서술을 세세히 제시하지 않더라도, 『Earwitness』는 그렇게 기성의 문법을 무시한 채 소리가 존재함을 역설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는 앨범이라 사료될 수 있겠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천용성의 『수몰』은 분명 『김일성이 죽던 해』 (2019)보다 트랙의 매무새에 있어 더욱 세련되어진 앨범이다. 이것은 천용성에게도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단편선의 프로듀싱, 정수민의 베이스, 서보경의 색소폰과 박기훈의 관악 연주, 코러스 세션과 몇 명의 피처링 아티스트 등 이 크레딧은 천용성과 단편선의 수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할 테지만 무엇보다 천용성을 이름이 아닌 어떠한 집합체의 통칭으로서 존재하게 만드는 기원이기도 하다. 이들의 연주는 장식적으로 풍성하고 그 장식 간의 위화감을 찾아볼 수 없기에 성공적이고 인상적이지만, 그렇다고 80년대 발라드나 90년대 포크, 00년대 인디 등과 비교하는 작업을 굳이 진행하고 싶지는 않다. 앨범 소개글에서 신현준이 말하듯 우리 시대의 모든 것을 과거의 현현으로 본다면 곤란하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이런 이유가 아니고서라도 『수몰』을 감상하는 데 반드시 요구되는 작업은 아니기 때문인 것도 있다.

그래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겠다. 내가 『김일성이 죽던 해』에 감탄했던 것은, 앨범을 기획한 의도에 있었다. 실제로 천용성 역시 김일성의 죽음과 무관한 삶을 살아왔고, 그것은 『김일성이 죽던 해』를 듣던 많은 이들도 같다. 그러니 그즈음 어느 날의 「대설주의보」도, 「동물원」을 찾아갔던 일도, 반드시 김일성의 죽음과 연관이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인데, 천용성은 당시 자신의 어린 시절을 굳이 김일성의 죽음과 연결지으며 그것을 일종의 포트키로 기능하게 했다. 나는 이 다소 기만적인 의도를 높게 샀던 것이다. 나는 『수몰』에서도 그 의도를 엿보았다. 누군가는 터부시되는 감정과 사라진 사람을 노래한다는 점에서 Weyes Blood의 『Titanic Rising』 (2019)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전술했듯 세련된 연주에도 불구하고 『수몰』에서의 심상은 그보다 피폐하게 느껴진다. 『수몰』의 앨범 커버는 무언가의 자연스러운 침잠을 연상시키지만, 그 심상은 정반대로 무너지고 부서진 무언가에 관한 것이다. 이 역시 심히 기만적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물론 이 ‘해석’은 반드시 『수몰』이라는 앨범을 ‘사운드와 메시지’ 따위의 이분법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는 지침이 아니다. 그 대신 『수몰』에서는,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것들이 모여 하나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겠다.

나까지 여기서 “분하고 더러운 팝”이라는 수사가 갖는 기조에 관해 논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수몰』에서의 가사를 곱씹으며 『수몰』이 그저 아름답고 깊은 울림을 동반한다고만 이야기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당신은 “세상의 예쁜 것들은 모두 거짓인가요”라는 「중학생」의 가사를 보고도, 혹은 「있다」와 「거북이」, 「수몰」 등에서의 그리움에 관한 가사를 보면서도 이들이 그저 심미적으로 훌륭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매일 조금씩이라도 나아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싶어요」의 가사는 절규와 같이 느껴지고, 「설」에서의 어머니와의 일상을 다루는 가사는 흘러만 가는 시간을 향한 원망처럼 느껴진다. 사실 천용성 역시 그 『수몰』하고 있거나 이미 『수몰』한 것들을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을 테다. 마치 「반셔터」에서의 가사가 전하듯 고장 난 사진기로 피사체를 온전히 기록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는 그저 『수몰』을 통해, 그 윤곽조차 잡히지 않는 감정과 기억을 더듬으며 생각에 잠길 뿐이다.

 

 

 

 

 

 

 

지금 현시점에서 내가 SoundSupply Service가 지난여름 런칭과 동시에 발매한 첫 번째 컴필레이션 앨범 『SCA1 (SIDE A)』에 관해 새로이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다. 물론 이것은 내가 일전에 다뤘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때때로 밝혔듯 전자음악의 특성상 가사가 없다는 점이 우리의 담론과 생각이 개입할 여지를 제한적으로 축소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정도가 컴필레이션 앨범의 특성상 더욱 심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이들을 다시 한번 이 자리에서 조명하는 이유는 SoundSupply Service의 넓은 시야와 구체적인 비전, 그리고 『SCA1 (SIDE A)』에서 드러나는 지속가능성을 향한 열정과 고민이다. 다만 내가 이미 『SCA1 (SIDE A)』의 개개 트랙에 관한 감상을 서술한 바 있기에, 이 자리에서는 지금 시점에서 더욱 흥미로운 지점을 짚는 방식의 서술을 선택할 생각이다.

사실 흥미로운 지점은 앨범 바깥에서 먼저 찾아볼 수 있었다. 한국대중음악상은 올해 진행된 19회 시상식을 기점으로 기존의 ‘일렉트로닉/댄스’라는 분과를 ‘일렉트로닉’으로 재정의하였다 ―우리 <온음>도 해당 분과를 ‘일렉트로닉’으로서 다룬다. 이것은 케이팝 분과의 신설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사안이고 이에 관해서는 더욱 심도 있는 논의가 오고 갈 필요성이 있다. 하지만 이 자리는 그러한 사안에 관해 이야기하기에 적절한 자리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여전히 ‘일렉트로닉’ 분과로서 이야기되는 트랙 중 적지 않은 수가 충분히 ‘댄스’, 즉 춤곡으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대중음악상뿐 아닌 많은 매체에서 ‘댄스’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용례는 단순히 춤곡이라기보다는 클럽 무대에서 관중들의 호응을 유도하고 특정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모든 노래라는 의미로 생각보다 넓은 범위를 아우르고 그러기는 ‘일렉트로닉’이라는 단어에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전자음을 쓴다고 모두가 ‘일렉트로닉’이 아니고, 멜로디와 리듬 구조가 명확하지 않다고 모두가 ‘댄스’가 아닌 것이 아니듯,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결국 ‘일렉트로닉’과 ‘댄스’라는 단어가 상호 보완적인 관계라는 것이겠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SCA1 (SIDE A)』는 정말 말 그대로 전자음악의 하위 장르를 포괄하는 ‘일렉트로닉/댄스’ 앨범으로서 이야기될 필요성이 있다.

물론 SoundSupply Service는 이들의 음악을 소개하며 전자음악을 위시한 표현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고 그런 측면에서 나의 시도는 잘못된 앵커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수호의 「Long Place」나 cjb95의 「Move Your Body」와 같은 트랙들을 두고 전자음악적 작법이나 전자음악과의 연관성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일 것이다. 동시에 프로듀서로서의 Beautiful Disco가 작업한 「Curb」를 두고 흑인 음악의 유산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것도 순서가 맞지 않겠다. 중요한 건 『SCA1 (SIDE A)』에 참여한 이들이 무엇을 지평 삼고 있는지, 또 그들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그 여부겠다. 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하거나 그러한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이들이 클럽이 문을 닫는 시대가 되자 누군가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자신들의 음악을 선보인다. 이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들 역시 자신들의 음악을 전자음악이 사유되던 방식을 중심으로 어필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겠다. 국내에서 전자음악에 관한 논의는 생각 외로 아주 활발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주류와 비주류 사이에서 자신들의 음악을 저울질하는 이들이 저마다 기술적으로도 괜찮은 트랙들을 가져오면서 그들의 넓은 시야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이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전자음악에 관한 논의를 활발하게 가져가야만 하고, 나는 그런 의미에서 『SCA1 (SIDE A)』와 SoundSupply Service를 주목한다.

 

 

 

 

 

 

 

장필순. 한국 대중음악의 발자취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하나. 그런 그녀의 11번째 정규 앨범 『페트리코-장필순』을 들으며 김정미의 『Now』 (1973)가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니 기분이 오묘하다. 물론 70년대 당시의 김정미가 합당한 평가를 받아들기에는 그 시대상으로 인해 쉽지 않았던 면이 있고, 그 탓인지 후대의 평가에서도 장필순과는 다르게 김정미 그녀가 불렀던 아름다운 가사들이 오히려 그 시대상을 조명하기 위해 잊힌 감이 있다. 다만 나는, 그 둘이 자연을 소재로 다루는 과정에 몇 가지 큰 차이가 있을지언정, 본작이 『Soony 6』 (2002) 이후 장필순이 제출한 작업물 중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 같다.

혹자는 『페트리코-장필순』의 전자음을 강조하는 서술을 하고자 할 테지만, 그럼에도 본작의 소리는 다분히 목가적이고 공간감이 느껴지며, 그 위에서 장필순은 그녀의 음색과 노랫말을 통해 인간 천연의 감정을 일관적으로 자극하기를 시도한다. 그런 그녀의 태도는 너무 가볍지도 않지만, 민중가요로서의 사명이라는 지나치게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아 보인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당장 「안개오름」과 「페트리코」를 감상해보라. 이 얼마나 따뜻하고 편안한 풍광이란 말인가. 「개똥이」에서는 자신의 반려견과 다시 한번 해안가를 걷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하고, 본작에서 가장 이질적인 성격의 「숲의 레퀴엠」에서는 따뜻한 초여름―수국의 개화기―의 바람을 추억하며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짚는다. 장필순 본인의 에세이에 가까운 본작의 끝에서 우리는, 「불꽃놀이」나 「소랑」의 낭만을 마주한다. 자연과 시간의 소중함을 역설하는 본작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본작은 너무나도 다정하고 따뜻하게 우리를 감싸 안는다.

장필순이 그녀의 동반자들과 이 나라의 가장 큰 섬으로 거처를 옮긴 것도 벌써 십 수 년 전의 일이다. 회색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섬은 자연으로 가득한 곳으로 인식되지만, 사실 그동안 그 섬의 적어도 절반은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나머지 절반의 해안가도 관광지처럼 변해갔다. 나무들은 베어지고, 해안가는 그 특유의 색이 바랬으며, 그곳에 새겨진 저마다의 추억과 기억들은 시간의 흐름이라는 불가역적인 힘에 의해 마모되었다. 하지만 장필순은 어떻게든 그것에 관해 노래하고, 기록하며, 그 결과물을 우리의 앞에 선보이고 있다. 나는 다른 사실보다, 그녀의 길고 긴 커리어 어딘가에서 이러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작지 않은 안온함을 느낀다. 그런 작품에 관해 감상을 남길 수 있는 것만큼 기쁜 일도 없다.

* 본고는 일전에 작성한 글을 발췌한 글임을 알립니다.

 

 

 

 

 

 

 

“너무나도 큰 비극은 감히 예술의 이름으로 건드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매우 조심해야 한다. 다만 잊지 않고 기억하는 행위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진술에서 드러나듯 정재일의 『psalms』는 너무나도 큰, 어떤 특정한 비극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그 비극은 바로 1980년의 5.18 민주화운동이다. 21개의 트랙, 1시간 남짓의 러닝타임을 가진 이 넓고 공활한 본작에는 40년 전 참상의 황망함과 참혹함이 정은혜의 구음과 부다페스트 스코어링 오케스트라 합창단의 연주와 합창, 그 외의 앰비언트와 소음으로서 재구성되어있다. 정치적 안위를 위해 내란을 꾸민, 그럼에도 사죄하지 않은 채 영면에 들어간 전두환 그리고 노태우와 희생자의 유족 앞에 머리를 숙인 한 공수부대원 간의 대비가 본작의 소리와 겹쳐지는 그 순간에, 역사책 속의 그 사건이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크나큰 상흔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금 깨닫게 되는 셈이다.

인간의 역사는 왜 고통과 상실 없이는 쓰이지 못하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무심하게 돌아가는 역사의 거대한 쳇바퀴 앞에서 정재일은 시편 89편 48절의 구절을 빌려 울부짖는다. “기억하소서, 제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당신께서 모든 사람을 얼마나 헛되이 창조하셨는지를.” 정재일은 단 한 줄의 구절로 헌정 사상 최악의 사건을 비판하는 데에 본작의 절반이라는 지분을 할애했다. 동시에 그는 총포 앞에서 거친 숨을 내쉬던 이들의 마지막 절규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의 절규는 다름 아닌 시편 26편 9절로 표현된다. “내 영혼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생각해보면 당연하게도 시편과 5.18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나, 정재일이 5.18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이렇듯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적실하다.

물론 5.18을 노래한 음악들은 다행스럽게도 많았다. 「임을 위한 행진곡」 (1981)과 「오월의 노래」 (1989)가 대표적이고, 그 외에도 정태춘, 이선희, 가장 최근에는 나훈아까지, 정말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목소리와 이 역사 속 비극을 매개해왔다. 나는 단순히 본작이 이들의 행렬에 함께 하기에 올해의 앨범 후보로 올리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 방식이다. 본작은 순수예술이 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중음악이 될 수도 없다. 본작은 엔터테인먼트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경건한 기도문인 것도 아니다. 그 어느 것도 될 수 없는, 고요하지만 고요하지 않은 소용돌이의 단면에서 정재일은, 너무나 훌륭한 방식으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작품을 만들어냈다. 「memorare」, 「how frail the sons of man you have created」. 본작의 마지막 두 트랙을 통해 정재일이 부언하듯이, 나는 본작을 올해 가장 중요한 앨범 중 하나로 꼽을 수밖에 없었다.

* 본고는 일전에 작성한 글을 발췌하여 수정한 글임을 알립니다.

 

 

 

 

 

 

 

 

Album Of The Year! “두려워하지 마라. 이 섬은 소음과 소리와 달콤한 노래들로 가득하다. 즐거움을 줄 뿐 해치지 않을.” 이는 William Shakespeare의 『템페스트』에 등장하는 칼리반의 대사다. 아마 이 대사를 그룹사운드 잔나비의 『환상의 나라』(부제 : 지오르보 대장과 구닥다리 영웅들) 서두에서 읊는다 하더라도 크게 위화감은 없을 것이다. 칼리반이 『템페스트』 내에서 어떤 성격을 가진 인물인지, 또는 그 행적이 어떠한지 그 여하와는 관계가 없이, 그의 말대로 『환상의 나라』 역시나 소음과 소리와 달콤한 노래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줄 뿐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매한가지다. 조지환의 말대로 『환상의 나라』는 하나의 크고 화려한 장관과도 같다. 장관도 그냥 장관이 아니라, 『MONKEY HOTEL』 (2016)과 『전설』 (2019)이 지니고 있던 장점들만을 모아 만든, 그 품이 아주 넓은 장관이다. 그 장점들이라고 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겠다―앨범을 앨범으로써 너무나도 가치 있게 만들고, 하나의 이야기책과도 같이 재밌게 만드는 능력, 무거울 수 있는 주제 앞에서 발휘하는 재치가 담긴 가사, 거창하고 과장된 듯 보이는 와중에도 빛이 나는 매력적인 연주와 가창. 『환상의 나라』는 그러한 장관이다.

그 장관 속으로 들어가 보자. 『환상의 나라』는 “여전히 꿈과 희망, 사랑과 우정, 성실과 용기가 넘쳐 흐르는 곳”이다. 동시에 “철없던 밤과 낮”의 나라이고, 지나간 시간을 부르짖는 나라이며, 그런 면에서 낭만주의적 세계관의 나라이기도 하다. 어찌나 낭만주의적인지 이곳에서는 파랑새마저 활기찬 날갯짓과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대표되지만, 그 일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외딴섬 로맨틱」에서 찾아가는 무지개가 떨어진 섬은 결국 닿을 수 없거나 존재하지 않는 섬이고, 「고백극장」에서의 우정과 사랑은 처절하게 쟁취해야만 하는 대상이다. 「소년 클레이 피전」에서의 별이 되려던 소년은 총성 한 발에 끝없이 추락하고, 「용맹한 발걸음이여」에서 성실이라는 개념은 “멍청한 믿음”이라는 말과 밀접하게 묘사된다. 그러나 이 『환상의 나라』에서는 그런 것들마저 최정훈의 익살스럽고 명랑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불린다. 『환상의 나라』는 결국 우리의 낭만주의마저 현실의 어두운 이면과 결별할 수 없는 것임을 일깨워주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낭만주의가 온전한 형태의 것이 아니라고 역설하는 곳은 아니다. 의미심장하게도 그들이 그토록 닿고 싶어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무지개는 「컴백홈」에 관한 삽화의 호수에 담겼다. 나르키소스는 자신이 바라보던 호수에 빠져 목숨을 잃었지만, 『환상의 나라』에서는 우리가 그 호수에 빠져 현실로 돌아가기를 유도하는 것 같다. 우리의 낭만은 현실과 병렬적인 구조는 아닐지언정 어떻게든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비틀 파워!」는 『환상의 나라』가 잔나비 본인들이 지나온 청춘과 추억의 나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지표다. “Dear Mr. John, Mr. Paul”과 같은 가사나, 쇼 비즈니스와 예술에 관한 인식 사이의 괴리를 노래하는 것이나, 사이키델릭하면서도 코러스와 오케스트레이션 등의 다채로운 치장을 덧대어가는 연주 방식이나, 이들은 충분히 자신들의 음악이 그 시절 로큰롤이 쫓아 마지않던 미덕과 연관되었다고 주장한다. coloringCYAN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본작을 두고 The Beatles의 『Sgt. Pepper’s Lonely Heart Club Band』 (1967) 따위의 앨범을 언급하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들에게 『환상의 나라』는 John Lennon이 Paul McCartney와 함께하던 시절의 나라이기도 한 셈이다. 특히나 이와 같은 연주는 비단 「비틀 파워!」만의 특질이 아닌데, 「페어웰 투 암스! + 요람 송가」와 「밤의 공원」이 그런 면에서 가장 눈에 띈다. 이들에게 1964년 언젠가의 JFK 공항에서 벌어진 사건―브리티시 인베이전―은 상당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젊음의 표상을 자처하면서도 그 이면을 노래하기를 즐기는 것도 이와 결을 함께 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환상의 나라』는 그 품이 이다지도 넓다.

이러나저러나 『환상의 나라』는 잔나비가 오랜 기간 꿈꿔왔던 순간처럼 보인다. 『MONKEY HOTEL』에서 그들은 상흔을 입은 모든 젊음을 아우를 수 있는 노래들을 했고, 『전설』에서는 자신들이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것들을 보편적인 메시지로 치환시킨 노래들을 했다. 그동안 그들을 향한 평가는 유수의 브릿 팝, 체임버 팝, 사이키델릭 록, 프로그레시브 록 아티스트들을―이를테면 앞서 언급된 The Beatles나 Coldplay, 심지어는 신중현과 엽전들까지―소환하는 것에서 시작되었고, 그것은 곧 그들의 지향을 향한 호오를 가르는 지표가 되었다. 재현적 반영을 두고 기시감과 완성도 사이에서 그 갈피를 잡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환상의 나라』는 하나의 근사한 이야기책이라는 점에서, 부담스러울 정도로 자랑스럽게 제출한 전시라는 점에서 인상적인 결과물이고, 젊음과 낭만을 향한 동경을 우리의 현실과 매개하는 그 방식이 근사하다. 우리의 대중음악은 지극히 낭만주의적이면서도 비즈니스적이고, 그런 면에서 현실주의적이다. 하지만 이들은 「페어웰 투 암스! + 요람 송가」에서 이러한 가사를 쓴다. “신음하는 친구여, 자신 있게 고갤 떨궈라!” 『환상의 나라』와 같은 작품들이 계속해서 제출되는 한, 우리의 낭만은 결코 현실 속에서 허황하지만은 않을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소음과 소리와 달콤한 노래들로 가득한 『환상의 나라』를 마주하며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올해 최고의 앨범들을 꼽으라 한다면 그중 한 자리의 주인은 무조건 『환상의 나라』다. 동시에 나는 『환상의 나라』를 가장 높은 위치에 올린다.

* 본고는 일전에 작성한 글을 발췌하여 수정한 글임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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