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김도언의 『Damage』 라이너노트에 적힌 임다울의 소개글에서 임다울은, 초기 전자음악에 사용되던 원시적인 소리를, 그러니까 전자신호가 만들어내던 음을 ‘자연―自然―스럽지 않은 것’으로 묘사한다. 전자음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었던 때 이후로 벌써 한 세기보다 더 긴 시간이 흘렀고, 작금의 대중음악에서 전자음, 그리고 전자음악은 생각보다 넓은 범위를 아우른다. 본디 전자음이 아닌 것도 신시시즈나 샘플러 기반의 가상 악기 등 수많은 방법의 전자신호 체계를 통해 조금이나마 모사할 수 있게 되었고―전자음 연구의 최종 목표 중 하나는 자연의 모든 소리를 완벽히 재현하는 일이다―전자음은 그 어느 때보다 우리의 귀에 너무나도 익숙하고 모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소리가 되었다.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소리가 된 것이다. 자연스럽지 않았던 것이 자연스러워지던 일련의 과정, 이것은 분명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상당히 복잡한 기전을 갖는 대사건의 연속극이지만 작금의 대중음악을 사유하는 우리가 현재의 시점에서 미시적인 관점을 통해 보았을 때 그렇게까지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그런 작금의 대중음악 시장에서, 김도언은 『Damage』를 발매하며 무엇이 자연스럽고 무엇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인지에 관한 의문을 제기한다.
김도언의 의문과 제기는 그저 본인의 창작 활동이 작금의 전자음악이 생산되고 사유되는 방식을 기저로 삼고 있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라이너노트에서 서술되었듯, 김도언과 임다울은 이어령의 동시 「활이 아니라 하프가 되거라」를 읽으며 폭력과 무구함이라는 두 가치에 관한 생각을 나누었고, 동시에 임다울은 하프라는 악기가 활이라는 무기에서 유래한 것이라 언급한다. 폭력과 무구함, 이 둘은 사전적인 의미에서 완전히 반대쪽에 있는 각기의 개념 아래 종속된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두 단어의 가치는 주관적인 것이고 이는 결국 그 가치가 개인의 가치 판단으로 결정됨을 의미한다. 자연스러움과 자연스럽지 않음이라는 것도 이와 비슷한 처지다. 무엇이 특정한 소리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규정하는가. 그것은 소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의 세공이나 연마일 수도 있고 소리 그 자체의 출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 틀어서 생각해보면, 세공이나 연마는 결국 무언가에 수많은 흠집을 내어 그것을 매끄럽게 만드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무수한 폭력의 결과일 수도 있고, 소리 그 자체가 자연스럽도록 연출된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반드시 무구하다고 이야기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이는 반대의 경우에도 충분히 성립할 만한 명제일 테다. 특히나 우리가 자연스러움과 무구함의 가치가 서로 같은 위치에 있다고 여긴다는 점에서―혹은 ‘때 묻지 않음’을 공통되게 연상시킨다는 점에서―이는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김도언은 『Damage』에 관해 ‘어린아이를 화자로 내세운, 「청명」한 하늘의 풍경이 「Green Screen」으로 바뀌는 이야기의 앨범’이라고 말했다. 김도언의 전언은 트랙리스트를 고려할 때 지나치게 간결하기 그지없으나 지금까지의 논의를 살펴볼 때 이는 그가 『Damage』를 통해 두 가지 관계, 그러니까 폭력과 무구함, 그리고 자연스러움과 자연스럽지 않음에 관한 고찰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음과 이음동의임을 시사한다. 그렇다고 그가 ‘그 둘의 구분을 나누는 기준이 명확하다’라는 결론을 도출했다거나 우리에게 그 결론을 도출하기를 유도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럴 생각도 없어 보인다. 그 대신 김도언은 「청명」과 「Green Screen」을 각각 『Damage』의 처음과 끝에 두어 화자와 청자가 모두 자연의 연출과 연출된 자연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게 만들었다. 자연스럽거나 자연스럽지 않은 소리의 총집합체 사이를 우리는 그저 떠돌아다니게 될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물론 우리가 『Damage』에 몇 없는, 저 심히 Bon Iver 스러운 가사를 통해 이를 온전히 눈치채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이미 「청명」, 「Waver」, 「늪」과 같은 트랙에서의 전자음들이 실재하는 우리 자연, 하늘과 땅과 바다의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렇다고 이 전자음들이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것과 완전히 이질적인 성질을 가진 소리가 아니라는 것 역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요새」에서 피처링으로 참여한 황소윤은 “네 개의 발자국 걸음 걸음 걸음 걸음 속에 단서가 있습니다”라는 가사를 읊는다. 저 네 개의 발자국은 김도언의 전언대로 게임 속의 캐릭터가 움직이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악곡 형태에서의 네 박자의 진행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우리가 그 단서를 찾기 위해 굳이 용을 쓸 필요는 없어 보인다. 「Newbie」에서의 이랑이 읊는 가사대로 그것을 그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기호와 숫자, 신호들” 정도로 남겨놓아도 일단은 지장이 없을 것이란 얘기다. 『Damage』는 충분히 듣기 좋은 일렉트로닉 트랙으로 가득하다. 일단 『Damage』에서 가장 뛰어난 두 개의 트랙 「SaGA」와 「모습을 바꾸는 요정들」을 살펴보자. 8마디 혹은 특정한 단위마다 새로운 소리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그것은 멜로디를 구성하는 리드 신스거나 둔탁한 질감의 드럼일 수도 있고, 노이즈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전반적인 분위기를 바꾸는 트랜지션 그 자체가 될 수도 있다. 이런 구성의 진행이나 연주들은 어디선가 들어본 것일 테다. 장필순의 『페트리코-장필순』 (2021)이나 Sufjan Stevens가 발매한 몇 장의 앨범들, 때로는 현대 앰비언트의 큰 바위 얼굴들이 연상되기도 하고 그 외에도 가능한 경우의 수는 차고 넘친다.
반면 김도언이 「꿈 속의 춤」에서의 피처링 아티스트로 이민휘를 선택했다는 점은 놀랍다. 아르페지오와 보컬 샘플 사이로 이민휘의 구슬픈 목소리가 위태롭게 흘러가는데, 이것이 놀라운 이유는 다름 아닌 김도언이 그녀의 목소리를 작정하고 악기처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Prophet」에서는 김한주의 목소리에 아예 보코더를 덧씌우는 모습도 보인다. 이것은 「Newbie」와 「창」에서 각각 이랑과 Rad Museum의 목소리를 활용하는 방식과는 또 다르다. 후자의 트랙들에서 이들의 목소리로 비교적 완성된 수사 혹은 문장을 노래하는 것이 뚜렷하게 들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생각해보라. 「Newbie」와 「창」에서의 가창이 우리가 찾던 단서라고 하기에는 그 비중이 탄산음료의 합성착향료만큼이나 작다. 그러니 우리는 도리어 『Damage』를 감상하며 가사에 크게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 셈이다. 김도언의 작편곡 능력이 여실히 드러난 트랙들을 보라. 「Stock Quartet」 같은 현악 중주, 「청명」과 「Green Screen」이 보여주는 수미상관의 미, 그리고 「Portal」과 「늪」과 같은 Oneohtrix Point Never 식의 앰비언트 팝 등의 혼재야말로 김도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만의 세계인 것이다.
다만 대중예술은 유희이기 이전에 이미 표현의 영역인지라 어떠한 고찰을 진행하지 않은 채 『Damage』를 그저 듣기 좋은 일렉트로닉 앨범으로 남겨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프로그레시브 음악의 변화무쌍한 전개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건 결국 소리이고 재미이지만 김도언이 우리에게 던져준 소리는 세계의 질문이 모이는 회랑에서 시작된다고 임다울은 기술한다. 『Damage』를 들으며 게임 음악의 영향을 발견했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Damage』의 소리가 자연의 소리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목가적이라고 묘사하는 것 역시 매한가지다. 이 모든 반응을 가능케 하는 건 우리의 경험이라는, 무한히 넓은 스펙트럼에서 극히 일부만을 볼 수 있는 우리의 좁은 화각에 비친 피사체일 것이다. 이 좁은 화각의 효용성에 관해 의문을 던지는 김도언이 선지자의 위치를 자처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폭력과 무구함의 기준이 불분명할지 모른다고 앞선 문단에서 기술했듯, 자연스럽지 않은 소리의 집합을 자연의 연출이라고 정리하기에는 자연스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고, 그렇다고 전자음이 우리의 귀에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이 시대에 그저 자연스럽지 않은 소리라고 하기에도 영 이상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우리의 화각에 던져진 김도언의 질문은 이 이상한 앨범을 감상하는 데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었지만, 우리는 좀처럼 이를 딱 잘라 정리할 수가 없다.
그러니 우리는 『Damage』를 들으며 서로 다른 이미지를 연상하는 와중에도 경험과 반응이라는 인과관계의 출처를 다시금 물어야만 하는 셈이다. 김도언은 자신이 게임에 크게 관심이 없다고 말은 했으나 전자음악이 발달하는 과정에 게임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김도언이 자연과 우주에 관해서 얼마나 많은 관심이 있을지 역시도 미지수지만 그가 지평 삼는 전자음악은 자연의 소리를 담기를 갈망하고 우주의 신비를 탐닉하며 시각 매체를 생산하던 이들에 의해 크게 발전했던 바 있다. 그런 면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있지만, 넘치는 창작욕만이 Flying Lotus가 자신의 침실을 DIY 스튜디오로 만들게 했던 것이 아니듯, Kanye West와의 작업만이 Justin Vernon이 OP-1을 구매하게 했던 것이 아니듯, 본보기를 출발선으로 오해해서는 곤란하겠다. “우리는 어떻게 전자음의 향연에서 자연을 연상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가상과 실재를 모두 현실 아래에 둘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폭력과 무구함의 경계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그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떠한 이유로 「모습을 바꾸는 요정들」을 이미 알고 있는가?” 다시 한번,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누군가는 대중음악의 존재가치를 다른 누군가가 따라 불러주는 것에서 찾는다. 다른 누군가는 그것 이외에서 대중음악의 존재가치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글쎄다, 우리는 Daft Punk의 음악을, Jamie xx의 음악을, 혹은 Burial이나 James Blake의 음악을 단순히 따라 부르기 좋아서 듣는 것 같지는 않다―가사가 없거나 없어도 상관이 없기에. 이들의 음악을 그러니까, 전자음악을 듣는 이들은 대부분 리듬과 멜로디에 몸을 맡기거나, 시각 매체와 함께 즐기거나, 그 외의 다른 무언가를 상상하고, 이들의 세계를 탐닉하기를 즐긴다. 이것이 전자음악이 갖는 대중음악으로서의 존재가치라면, 거기에 김도언의 『Damage』는 한층 더 깊이 들어가 다른 존재가치를 모색하는 것일 테다. 정치적 반영이 아닌 추상적 표현으로서의 대중음악. 현상이 아닌 기록으로서의 대중음악. 표현의 기록으로서의 대중음악. 『Damage』는 피로한 보물찾기를 유도하는 기록이 아니다. 『Damage』는 앞으로의 우리의 관념과 생각을 조금은 바꿔놓을 수 있을, 조금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기록이다. 김도언은 『Damage』를 통해 자신의 디스코그래피를 성공적으로 개시했다. 그의 의중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해도 크게 상관은 없겠다. 그의 질문을 받은 우리가 도리어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다고 해도 매한가지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무엇이 자연스럽고 또 그렇지 않은지, 무엇이 무구하고 또 폭력적인지 사전적인 의미 이외의 기준을 제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김도언의 행보를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Damage』가 그것을 증명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