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나비, 『환상의 나라』

by coloringCYAN
   

『MONKEY HOTEL』, 『전설』 등의 잇따른 성공에도 잔나비는 안주하지 않았다. 키보디스트 유영현의 과거 학교폭력에 대한 재조명과 그로 인한 그의 자진 탈퇴, 그리고 윤결과 기타리스트 김도형의 군입대 등의 변화에도 잔나비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러한 상황들의 격변 속에서도 다음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자 했다. 그룹사운드 잔나비의 본격적인 성공가도의 시작을 알렸던 『MONKEY HOTEL』이 ‘몽키 호텔’이라는 콘셉트를 굵직하게 잡은 채 빈티지한 70-80년대 팝과 록을 넘나드는 소리들로 대중들과의 친숙함을 부각하고자 했던 앨범이었다. 『MONKEY HOTEL』에는 그들이 지향하고자 하는 소리들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소리들이 어떻게 대중들의 귓가에 공존할 수 있을까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담겨있었다. 『MONKEY HOTEL』이 지금까지 기억에 남을 수작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그러한 고민의 결과물일 것이다.

다음 정규 앨범 『전설』은 개인적으로 『MONKEY HOTEL』의 성취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앨범이라고 생각한다. 『MONKEY HOTEL』을 통해 그들의 예술적 지향점과 대중친화적 행보 간의 조화를 이끌어낸 다음, 그들은 진정으로 그들이 무엇을 동경해왔으며 그것을 어떻게 구현해내고자 했는지를 명확히 했다. 비록 『MONKEY HOTEL』보다 콘셉트나 메시지를 즐기는 맛은 떨어질지라도 ― 『전설』은 애초에 그것을 겨냥한 앨범이 아니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 개별 트랙들의 매력이 우리를 더욱 강하게 앨범 속으로 이끈다. 1970년대에서 80년대 사이의 록과 한국의 가요/발라드를 오가는 소리들의 연상이 잔나비라는 그룹사운드를 거치며 그들만의 것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전설』에서 우리가 쉬이 목도할 수 있는 장면이다. 잔나비가 『전설』에서 삼고자 했던 레퍼런스들이 잔나비를 잠식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그것들이 비로소 잔나비의 음악이라고 인식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전설』의 각 트랙들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매력들을 마음껏 향유하면 그만일 따름이다. 그렇게 되고 나니 「전설」, 「꿈과 책과 힘과 벽」과 같은 탁월한 트랙들을 비롯해 열두 트랙이 각자의 매력과 스타일을 뽐내면서 부드럽게 귀에 꽂힌다. 각 트랙의 완성도에 흠잡을 곳이 거의 없는 이러한 앨범은 걸작이라 불려 마땅할 것이다.

필히 『전설』은 앞으로도 더욱 강하게 우리에게 회자될 작품이고, 어쩌면 잔나비는 그 앨범을 통해 그들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 것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그들은 안주하지 않았고, 멤버의 변화가 있었음에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전설』의 발매로부터 2년이 지나, 그들은 우리를 새로운 앨범 『환상의 나라』로 인도한다. 놀랍게도 본작, 『환상의 나라』는 잔나비가 그들이 창조해낸 걸작 『전설』로부터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해 어떠한 고민을 했는가를 그대로 드러낸다. 가령 본작은 『MONKEY HOTEL』과 『전설』의 장점들을 한껏 끌어안는다. 『MONKEY HOTEL』에서의 굵직한 콘셉트와 그를 바탕으로 한 단단한 메시지, 그리고 『전설』에서 드러난 그들의 지향과 매력적인 트랙들의 향연. 이 모든 것을 우리는 본작을 통해 목도할 수 있을 것이고, 보컬 최정훈의 말대로 그들을 “한숨에”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본작의 면면을 뜯어보기 전에 앨범 자체와 마주해본다. 13트랙에 40분가량의 구성, 어떤 앨범이 떠오르는 구성이지 않은가? 바로 전설적인 밴드 The Beatles가 만들어낸 불세출의 대작 『Sgt. Pepper’s Lonely Heart Club Band』가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3번 트랙 「비틀파워!」의 영문 제목인 ‘A Ballad of Non Le Jon’은 The Beatles의 「The Ballad of John and Yoko」의 패러디이기도 하고, 본작 구석구석에서 The Beatles의 향취를 우리는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본작이 『Sgt. Pepper’s Lonely Heart Club Band』를 강하게 레퍼런스 삼았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싸이키델릭-록의 대표 격으로 꼽히는 작품이자 그 뒤를 잇는 프로그레시브-록의 단초가 되었다고 평가받는 『Sgt. Pepper’s Lonely Heart Club Band』에서 싸이키델릭함이 어느 정도 걷히고 오히려 보다 후대의 프로그레시브-록의 장중한(본작에서는 뮤지컬/오페라적 요소와 같은) 색채가 덧입혀진 것이 본작의 방향성이다.

감히 추측컨대, 나는 키보디스트 유영현의 탈퇴가 본작의 방향성이 전작들과는 사뭇 달라지는 계기 중 하나로 남지 않았나 생각한다. 실제로도 잔나비의 이전 작품들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유영현의 탈퇴로 이후 잔나비 음악에서 사운드의 공백은 필연적이었고, 잔나비는 그에 발맞춰 본작에 관현악과 콰이어를 대동한 두터운 사운드스케이프와 새소리, 발자국 소리 등의 재치 있는 소리들을 더하며 그러한 공백을 메우고자 하였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본작의 발걸음은 기존에 잔나비가 보여줬던 것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이것은 같은 아티스트의 같은 콘셉트 앨범임에도 본작이 이전의 『MONKEY HOTEL』과 결별하는 결정적 지점이 될 것이다. 앞서 말했듯 『MONKEY HOTEL』에서 잔나비는 대중과의 공존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면 본작은 오히려 일반적으로 대중음악에서 통용되는 ‘대중적임’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본작은 “한숨에” 즐길 수 있는 앨범이고, 앨범의 모든 수록 트랙들이 유기적으로 기능하며 우리는 마치 하나의 긴 트랙을 듣는 것과 같은 효과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본작의 각 트랙들의 매력은 기가 막히게 출중하여 하나하나 파헤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첫 트랙 「환상의 나라」부터 그렇다. 「환상의 나라」는 1분여의 짧은 인트로성 트랙이지만 사실상 앨범 전체의 분위기를 요약한다고 봐도 무방한 트랙이다. 산뜻하게 울리는 현악 연주와 그 위로 얹히는 최정훈의 선명한 보컬 멜로디, 시적인 노랫말, 그리고 후반부에 치닫는 장중한 기타 연주까지, 우리는 그를 마주하는 순간 이미 ‘환상의 나라’로 인도되게 된다. 다음 트랙 「용맹한 발걸음이여」는 지저귀는 새소리와 함께 「환상의 나라」 초반부의 산뜻함을 고스란히 이어받는 유쾌한 트랙일 것이다. 그 와중에 사랑은 구름 넘어 환상은 아니지만 멍청한 믿음은 좀 필요로 해. 어서 여기 밤사이 깨어진 꿈의 조각을 주워가렴.”이라는 내레이션이 눈에 띈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이 내레이션은 어쩌면 본작에 내포된 주제의식을 적실하게 요약하는 한 마디일지 모르겠다.

그리고 「비틀파워!」는 본격적으로 잔나비가 본작의 진정한 방향성을 드러내는 시작점일 것이다. 소리에서도, 노랫말에서도(디어 미스터 존, 미스터 폴 ) 노골적으로 The Beatles를 레퍼런스 삼은 「비틀파워!」는 누군가에게는 그리운 향수와 같이 기능할 것이지만, 현재의 한국 록 씬에 있어서는 익숙하지 않은 방법론인지라 누군가에게는 고개를 갸웃할만한 트랙이 될 것이다. 달리 말하면 The Beatles의 음악에 익숙한 이들은 「비틀파워!」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붙일 수 있을지라도, 잔나비를 소비하는 ‘대중’, 그 중에서도 특히 MZ세대는 The Beatles의 영향력에서부터 멀어져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이 충분히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비틀파워!」는 친숙하면서도 낯선 트랙이며, 그로 인해 청취자의 배경에 따라 감상의 집중 양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어지는 「고백극장」은 어쩌면 본작에서 가장 몽롱한 연주와 함께 취한 듯 늘어지는 멜로디가 인상적인 트랙일 것이고, 기승전결이 탁월하여 우리가 자연스럽게 감상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트랙일 것이다.

「로맨스의 왕」부터 시작되는 중반부는 앞서 언급한 본작의 진취적이며(프로그레시브하며) 기존 잔나비의 행보들을 배반하는 단면들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로맨스의 왕」은 다이내믹한 연주의 구성과 함께 배경을 장식하는 콰이어가 빛이 나면서도 그렇게 무난하게 즐길 수 있는 트랙으로 끝나는가 싶다가, 트랙의 후반부에 트랙 전체가 빨리감기 되다가 삽시간에 느리게 뒤바뀌는 구성이 우리의 뒤통수를 친다. 이어지는 트랙 「페어웰 투 암스! + 요람 송가」는 결정타다. 행진곡을 연상케 하는 전반부, 「용맹한 발걸음이여」에서의 내레이션을 왜곡시켜 재생해 콘셉트를 강조함과 동시에 보다 장중해지는 순간을 거쳐 다시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는 중반부, 영화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송가와 같이 엄숙해지는 ― 그러면서 끝내 날 죽이지 못했던 그것은 진짜로 아팠다라는 니체의 말을 재치 있게 변형시킨 노랫말로서 탁월하게 트랙의 메시지를 마감하는 ― 후반부까지 「페어웰 투 암스! + 요람 송가」는 우리의 감상을 집중시켰다 해체시키는 작업을 트랙이 끝날 때까지 반복한다. 확실히 「페어웰 투 암스! + 요람 송가」의 그러한 시도는 본작이 가지고 있는 어떠한 진취적인 매력을 더하는 긍정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작의 후반부에 들어서면서부터 잔나비는 우리에게 이전까지의 자신들의 음악이 무엇이었는지 또한 보여주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음울한 분위기의 연주로 분위기를 환기하는 「소년 클레이 피전」에 이은 「누구를 위한 노래였던가」는 본작이 「페어웰 투 암스! + 요람 송가」까지 이어온 진취적 기예들을 차츰 그만두는 시발점이 된다. 점차 소리를 확장시켜가며 청자의 감정마저 고조시키는 전개가 탁월하면서도, 처연한 최정훈의 보컬이 트랙 전체를 함께 침잠시키며 극적인 효과를 배가시키는 「누구를 위한 노래였던가」, 『MONKEY HOTEL』의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의 후속 트랙이자 그와 유사한 무드를 공유하며 아련한 감상을 남기고, 후반부의 한껏 달아오르는 합창이 인상적인 「밤의 공원」, 흡인력이 있는 멜로디와 부드럽게 흘러가는 선율이 편안한 감상을 유도하며 본작에서도 가장 대중친화적인 트랙이라고 할 수 있을 「외딴섬 로맨틱」이 그렇다.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블루버드, 스프레드 유어 윙스!」를 지나 본작의 모든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는 내레이션으로 채워진 「굿바이 환상의 나라」를 지나면 「컴백홈」이 『환상의 나라』의 문을 닫는다. 2015년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컴백홈」이 본작의 문을 닫는 것은, 잔나비의 과거와 현재를 매개하는 본작의 마무리로서 아주 탁월한 방식일 것이다.

반복적으로 말하자면 본작은 “한숨에” 즐길 수 있는 앨범이다. 그것은 본작에 뚜렷한 서사가 소리와 이야기 양측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가령 본작 전체적인 사운드의 유기성은 잃지 않으면서도, 전반부의 진취적인 구성과 후반부의 다소 대중친화적인 구성을 고루 갖춘 것은 잔나비가 (보다 진취적인) 『MONKEY HOTEL』로부터 『전설』로 이행하는 과정을 그린 것일 테고, 꿈과 희망이 가득할 것만 같았던 환상의 나라에 입장하여 다시 독이어야만 했던 현실로 돌아가는 이야기는 마음 한편에 꿈을 품고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공감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해줄 것이다.

본작의 모든 트랙들이 고루 훌륭하여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나는 전반부에서 잔나비가 시도했던 여러 진취적 기예들을 높이 사고 싶다. 이미 대중들에게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한 그룹사운드가 스스로 대중들로의 접근성을 낮추는 일은 쉽지 않은 결단일 것이다 ― 비록 「외딴섬 로맨틱」과 같은 트랙으로 어느 정도의 대중성은 확보해놓았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본작은 한국에서 잔나비라는 그룹사운드만이 할 수 있고, 만들 수 있는 앨범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중친화적인 메인스트림의 아티스트들은 이렇게 접근성이 낮을 수 있는 음반을 쉬이 만들기 어려울 것이다. 반대로 인디-씬의 아티스트들은 이렇게 스케일이 크면서 도전적인 음반을 만들 수 있는 여건 조성이 여러 가지 이유로(주로 경제적인 이유로) 어려운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렇기에 본작과 같은 앨범은 잔나비만이 현재 한국에서 잔나비만이 만들 수 있을 앨범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 물론 본작이 지금까지 한국에서 시도되지 않았던 사운드를 구현해냈다거나 하는 무리한 주장을 펼치는 것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워야 할 일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작을 잔나비가 그들의 지난 성취들을 밑바탕 삼아 한 단계 도약하고자 하였던 시도의 결과물로서 대해야 할 것이다. 앞서 적었듯 본작은 『MONKEY HOTEL』과 『전설』의 장점들을 조화로이 잘 꾸몄고, 현재의 한국 록 음악에서 쉬이 사용되지 않는 문법들을 실험적으로 배치함과 동시에 대중친화적인 행보를 저버리지 않는 균형 잡힌 모습을 보여줬다. 이전까지 그들이 보여줬던 음악과, 그에 따른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더욱 진일보한 그들의 모습이 그저 경탄스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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