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a Del Rey, 『Chemtrails Over The Country Club』

by XENITH
   

일단 Lana Del Rey(이하 Lana)의 『Chemtrails Over The Country Club(이하 본작)』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다. 두 명의 대통령으로 양분되는 2010년대의 미국을 통과하던 그녀는 수많은 이들의 조소와 냉대를 한 몸에 받아왔다. 그 이유도 참 다양했다. Lana가 페미니즘을 향한 명확한 지지를 표명하지 않았다는 이유―“사람들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열 받은 것 같아.”―한편으로는 그녀의 음악이 폭력을 미화하고 거짓된 기믹을 내세우고 있다는 이유, 혹은 그녀의 반항적인 허상의 이미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 등 그렇게 설득력 있는 비판이 아니었다는 점은 모두가 매한가지였지만 말이다. 사실 그러한 오해를 양산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소싯적 Lorde의 발언이었지만, 그런 맥락을 제하고 보아도 그 누구도 그녀를 변호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그렇게 Lana의 위상은 날로 추락해갔다. 그러나 2018년 어느 날 그녀가 자신의 러닝메이트로―Lorde, 『Melodrama(2017)』의 총괄 프로듀서였던―Jack Antonoff(이하 Jack)를 선택했다는 소식과 함께 발매된 몇 개의 싱글 트랙은 모든 것을 바꾸어버리기 충분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2019년 발매된 『Norman Fucking Rockwell!(2019, 이하 NFR)』은 평단과 대중의 함성 속에 파묻혀버리는 기염을 토하고야 말았다.

신기한 일이다. 음악이 단순히 음악으로만 수용되지 않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일일 터지만 단 한 줄의 가사―“Goddamn man-child.”―가 페미니즘 서사와 직결되고, 또 다른 한 줄의 가사―“Kanye West is blond and gone.”―를 진보주의의 또 다른 이름으로써 간주하는 것은 저들이 Lana를 그동안 어떻게 생각해왔는지 되짚어볼 때 큰 괴리가 느껴진다―심지어 NFR의 발매로부터 머지않아 기자와 대중은 그녀를 또다시 안티 페미니스트로 못 박기도 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여전히 “미국이라는 허상을 향한 조소.”,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예술가.”와 같은 문구로 NFR을 수식한다. 하지만 글쎄다, 자신의 활동이 프로파간다로서 이용되는 것을 크게 개의치 않았던 화가 Norman Rockwell의 이름 가운데 Fucking이라는 추임새를 넣어 자신을 지칭하고자 함은 오히려 저러한 수사들마저 격하하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Lana는 자신의 피아노 위로 Bob Dylan, Elvis Presley, Joni Mitchell, The Beach Boys 등 그녀의 수많은 영웅을 소환시켰다. 저들이 활동하던 60년대의, 대중문화를 선도하던 미국 내에서도 그 움직임이 가장 활발했던 캘리포니아 위에서 Lana는 자신을 얕잡아보던, 그리고 자신에게 불친절했던 모든 동향인―미국인―들을 향해 날카로운 냉소를 날린다. “미국 사회를 묘사하는 것에 큰 흥미를 느꼈어요.” Lana의 이 말 역시, 그녀의 음악이 그렇게 다가오듯 온전히 단어 그대로 와닿지 않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닐 듯하다.

다만 요약하자면, NFR에 관해 평단과 대중이 맞추었던 초점은 아주 완벽히 빗나간 무언가는 아니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간과해서는 아쉬울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Lana는 분명 꽤 괜찮은 작사가이지만, NFR의 진가는 Jack의 프로덕션과 Lana의 퍼포먼스가 겹쳐지는 지점에서 드러난다. 독주와 합주를 분주히 오가는 그랜드 피아노와 어쿠스틱 기타, 이따금 등장하는 관현악기의 연주가 나른하고 애달프며, 가볍게 읊조리는 듯한, 낭송에 가까운 가창과 만나는 그 지점 말이다―「Venice Bitch」에서 Jack이 선보이는 훌륭한 기타 연주는 덤이다. Lana가 오래전 캘리포니아 위에 서 있다고 앞서 말했던가. 그것이 연상되는 지점이 그녀의 가사가 아니라 이 소리의 향연에도 있다면, NFR은 아주 훌륭한 공감각의 경험을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일 테고, Lana의 비전은 아트 팝의 그것과 상당 부분 결을 함께할 것이다. 자, 이제 다시 돌아와 보자. NFR 이후 거의 2년 만에 본작이 발매되었다. 그런데 나는 이미 본작의 소리와 구성을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었다. 미국 사회를 향한 냉소가 담긴, 적당하게 비틀어진 시적 가사, 포크와 아트 팝, 드림 팝, 체임버 팝의 접경을 넘나드는 연주와 감미로운 가창. 실제로 본작은 많은 부분에서 NFR과 닮아있고, 이것이 내가 NFR에 관한 소회를 지나칠 정도로 길게 늘어놓은 이유다. 이것은 나에게 대단한 예지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럴 만했기에 도출된 결론이다. 말 그대로 변수가 많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의 예측을 아주 약간은 빗나가게 만든 변수에 관해 먼저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Lana가 자신의 발걸음을 캘리포니아 바깥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과 미국인으로서의 삶을 교차시키는 것은 본작에서도 여전하지만, 마이애미, 오클라호마, 네브라스카, 루이지애나―「White Dress」, 「Tulsa Jesus Freak」, 「Not All Who Wander Are Lost」, 「Dance Till We Die」―등 미국 전역을 유람하며 춤추고, 노래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이야말로 전작과 본작의 그녀를 구분 짓는 결정적인 요인일 것이다. 일반적인 시선에서 한 명의 팝 스타로 여겨지던 여인이 미국 그 자체를, 그리고 대중문화의 큰 바위 얼굴을 자처하는 뉴욕, 로스앤젤레스 등 대도시를 벗어나 비교적 크기가 작은 도시의 민중 사이로 뛰어든다. 그러한 그녀의 모습에는 팝 스타를 상징하는 사치품도,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자기 과시도, 섹스 어필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웨이트리스로 근무하던 19살 소녀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동틀 무렵까지 떠드는 모습, 시민들의 우경화를 정부 차원에서 화학 약품이 실린 경비행기를 동원해 조장한다는 음모론―『Chemtrails Over The Country Club』―이 파다한 군중들 사이에서 그저 죽을 때까지 춤을 추며 놀기를 권하는 모습만이 있을 뿐이다―물론 「Chemtrails Over The Country Club」의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벤츠 차량은 조금 값비싼 것이긴 할 테다.

이것은 보다 더욱 미국-적(美國-的)인 발걸음이고 반영일 것이다. 혹자는―미국의, 어쩌면 선택받은 이들이 주도하는―대중음악이 거의 모든 사람에게 유의미한 영향을 끼쳤고 동시에 끼치고 있다고 주장할 테지만, 여전히 무시할 수 없을 수의 사람들은 대중음악의 흐름 그 자체와는 무관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단순히 음악을 듣냐 듣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동시에 그러한 이들의 삶에 음악이 존재하는 것은 특별한 이유로서 존재함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심지어 본작에 담긴 Lana의 모습은 혹자가 여기는 예술상과는 괴리가 있다. 만일 이러한 모습들이 다른 이의 다른 작품에서 보인다면 평단과 대중이 이런저런 이유로 손가락질을 가할 게 분명하지 않은가?―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재미가 없고, 음모론은 허무맹랑하다는 이유로. 하지만 본작에는 어떤 이유에서든 담겨 있다. 아마 그 이유는 대중음악의 흐름에 예속될 리 만무한, 더 많은 미국인을 대변할 수 있는 장치로서, 본디 음악의 주인일 농민들과 민중들의 심상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로서 기능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그래서 본작은 더욱 미국적이다. 어쩌면 대중음악 내에서 미국이라는 단어가 그것을 수식함에 충분히 어울릴 수 있을 지점은 Frank Sinatra나 Aretha Franklin의 목소리도, Sufjan Stevens의 자취―『Michigan(2003)』, 『Illinois(2005)』―도, Lana 그녀의 NFR도 아닌 본작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앞서 언급한, 더 많은 미국인을 대변하고자 하는 음악, 농민들과 민중들에 의한 음악과 그나마 가까운 대중음악의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포크와 컨트리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듯 Lana와 Jack의 동행은 고전적인 심상과 아트 팝의 오랜 비전이 겹쳐지던 지점을 지나 바로 이 대중음악의 미국적인 영역을 향해 나아간다. 이들은 미국적인 소리의 조직을 위해 피아노와 기타, 베이스를 중심으로 빈티지한 드럼과 몇 가지 관현악기를 활용했다. 물론 본작에서까지 Mellotron이 사용된 것은 여러모로 신기하긴 하다만, 어쨌든 이들은 한 데 모여 근사한 편곡을 통해 그럴싸한 상품으로 변모했다. 「White Dress」, 「Chemtrails Over The Country Club」에서는 속삭임과 팔세토 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Lana의 가창과 피아노―그리고 Mellotron―의 연주가 겹쳐지며 은은한 여운과 잔잔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Tulsa Jesus Freak」와 「Dark But Just A Game」는 빈티지한 드럼과 기타의 연주가 매끈한 전개에 힘을 보탠다. 비교적 그 소리가 미니멀리스틱한 반주를 바탕으로 하는 본작이지만 「Dance Till We Die」의 중후반부는 이질적임에도 적당히 재밌게 감상할 수 있고, 「Not All Who Wander Are Lost」의 목소리의 향연은 특별하게 느껴진다. 물론 「Let Me Love You Like A Woman」이나 「Yosemite」같이 그 결과물이 아쉬운 지점도 있지만, 이 미국적인 작품에 덧붙여지는 “NFR에는 미치지 못한다.”라는 의견에는 가혹한 면이 있다고 생각된다.

NFR은 Lana를 Joni Mitchell과 Fiona Apple 그사이의 누군가로 만들었지만, 본작을 통해 그녀는 이 시대의 Joni Mitchell 그 자체가 되고자 함을 강력히 피력한다. 물론 그 둘의 예술관과 감식안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다만 어찌 되었든 본작은 음악 산업과 명예의 이면이 다뤄진 Joni Mitchell의 「For Free」를 부르는 Lana와 Zella Day, 그리고 Weyes Blood의 목소리로 마무리된다. NFR이 일종의 플루크였다는 의견을 단숨에 일축할 수 있을 본작의 마무리가 「For Free」라는 점은 그녀의 대담함이 엿보이는 지점이긴 하다만, 그런 건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다. 부잣집 맏딸이 Courtney Love의 팬을 자처하며 인디 레이블 Interscope와의 계약을 체결하고, 어느새 길어진 자신의 커리어 어딘가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의 진취를 모색하며, 아무도 그녀에게 기대하지 않았을 작품들을 연거푸 발매한다.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이게 무슨 일인지 나는 그 이유를 명확하게 짚어낼 길이 없긴 하나, Joni Mitchell의 고아한 피아노 선율이 끝나고 나면 왠지 모를 편안함과 만족감만이 남는다. 「For Free」의 등장인물이 그랬듯, Lana와 그녀의 동업자들이 꽤 훌륭한 공연을 선보였기 때문일까. 처음부터 끝까지, 이 미국적인 본작을 감상하고 나서 우리에게 대가로 요구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은 혹시 아닐까. 뭐, 사실 아무래도 좋을 듯싶다. 어쩌면 Lana와 Jack의 동행이 아직 시간이 조금 더 남았다는 것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지, 일단 이 정도로 덮어두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1 comment

ㅁㅁㅁㅁ 2021년 8월 11일 - 12:45 오후

잘 읽었습니다. Lana Del Rey에 대한 사전지식이나 관심이 없었으면 앨범에 대한 감상이 쉽게 되지는 않았겠군요. 앞으로도 이 아티스트가 어떤 말을 더 할 지 지켜보는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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