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뜨고코베인, 『Murder’s High』

by 조지환

ㄱ. 달아나고 있는 로큰롤

눈뜨고코베인의 노래들은 도망쳐 다니는 중이라고들 한다. 달아나는 모양새는 어떨까? 「Police On My Back」과는 다르다. 이퀄즈와 클래시의 노래들은 도망자의 (인종적이거나 계급적인) 취약성을 작동시키고 몰아붙이는 가혹한 경찰의 뜀박질을 상상하게 한다. 경찰은 도망자의 등 뒤에 붙어 따라다닌다. 그러나 눈코의 노래들에서는 도망자를 붙잡기 위해 달리고 있는 추격자를 찾을 수 없다. 물론 눈코의 노래들 속에도 누군가를 도망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도망자를 잡기 위해 뛰어다니지 않는다. 뛸 필요조차 없다. 이를테면 「외계인이 날 납치할 거야」가 그렇다. 무력하고, 가난하며, 고립되어 있는 누군가가 도망간다. 그러나 누구도 도망가는 그를 뒤쫓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 때문에 도망치는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가? 그를 도망치게 만드는 저 무언가는 뛰어다니는 경찰로 구체화되는 대신, 국민들에게 아무도 믿지 말라고 경고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구체화된다. 그것은 내달리지 않고도 도망자를 앞지른다. 경찰의 다리와는 달리 저 목소리는 이미 도처에 뻗어있기에 도망자가 어디에 있든 즉시 그의 귓전을 때리며 괴롭힐 수 있다. 그러니 뒤쫓는다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누나야」의 아이를 도망치고 싶게 만드는 것은 그 아이의 부모들이다. 그들은 구태여 아이를 찾아 구석구석 뒤지고 다닐 까닭이 없다. 그저 집에 들어앉아 있기만 하면 그만이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노라면, 아이는 허공에서조차 아비의 머리를 볼 테니까.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을 성싶을 때 노래는 저승으로 간다. 「스카이워커」에서 도주는 죽음이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절룩거리네」가 시민들의 삶을 파괴하면서도 붉은 악마를 응원하라고 종용해대는 국가를 향해 혼자 욕지거리 해대며 분노를 토할 때, 「스카이워커」는 반대로 손 쓸 길도 보이지 않으니 그저 달아나자며 서로를 다그친다. “하는 수 없잖아, 그래도 저기에서는 뭔가 나아도 낫겠지 여기보단.” 그리고 달아난다. 배제와 박탈로부터, 빈곤과 무시로부터.

…… 그러나 『Murder’s High』는 그런 경우가 아니다. 왜냐하면 『Murder’s High』가 빈곤이나 무시 같은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고는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정확히 적자. 우선 눈코의 모든 노래가 도망쳐대지는 않는다. 「외로운 것이 외로운 거지」는 분명 모종의 박탈 같은 것, 이를테면 인간적 유대의 박탈 같은 것을 마주보고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달아나지는 않는다. 「외로운 것이 외로운 거지」에서는 외로움을 지금까지의 상태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문제지,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이 노래는 결코 유대관계의 회복을 권장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둘이 같이 있다가는 외로움도 두 배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도망 중인 눈코의 노래들이 전부 다 빈곤이나 무시 같은 것들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아빠가 벽장」이 그렇다. 아마도 엄마는 아빠를 죽였음에 틀림없고, 그 주검을 처리할 길이 없어 벽장에 넣어두었음이 분명하다. 골 때리게도, 아이만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아이가 동네 친구들에게 우리 아빠는 밤낮 가리지 않고 벽장 속에 축 늘어져 있더라, 라고 말해버리면 어떡하지? 엄마는 이 곤란한 상황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아이를 다그친다. 글쎄 아빠는 영국에 가셨대도! 이 때 엄마는 분명 도망치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지도 모를 아이의 천진함으로부터의 도망이다. 또는, 들키고 잡힐지 모른다는 자신의 불안감으로부터의 도망이다.

『Murder’s High』에서도 누군가 도망치고 있는 것 같다. 도망에 앞서 살인이 있었으므로, 도망자는 살인자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살인자-도망자를 이제부터 M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M은 불안에 떨며 달아나고자 한다. 그런데 M의 불안이 무색하게도, 눈코의 다른 노래들이 그렇듯, 전력을 다해 M을 뒤쫓는 추격자는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를 쫓아야 할 경찰들은 첫 곡에서부터 곤란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M은 경찰에게 진술한다. 나는 어젯밤 아홉 시부터 자정 넘어서까지 고교 동창회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살인이 벌어진 시간은 밤 열한 시, 경찰들은 M의 알리바이 진술에 수긍하면서도, 피살자가 술병 같은 것에 맞아 죽었을 거라는 감식반의 추론을 보고받자 다시 M을 미심쩍게 본다.

경찰들은 마치 이야기 바깥의 청자를 자기들의 대화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듯한 모양새다. 한 경찰이 M의 알리바이가 완벽하다고 청자에게 (마치 다그치듯이 큰소리로, 반복해서) 보고하는 한 편, 또 다른 경찰은 여전히 A가 의심스럽다는 양 청자 앞에서 말을 흐린다. 청자는 마치 그 둘의 대화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 듯하고, 이미 양 편 모두의 수신자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첫 장면에서부터 『Murder’s High』는 고약한 메타렙시스métalepses의 현장이 되기 직전이다. 쥬네뜨가 전도된 메타렙시스의 극단적인 예로 제시한 코르타사르의 이야기에서, 독자는 자신이 읽는 중이던 소설 속 인물에게 암살당한다고 한다.1 마찬가지로 「알리바이」의 경찰들은 이야기 바깥의 층위들로 건너뛰어 와 청자의 발밑에 함정을 파려고 든다.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 속으로 떨어져 내려가게 되면, 그때부터 청자가 받아칠 수 있을 대답들은 전부 M이 살인자인가 아닌가에 관한 망설임의 표현으로 환원될 것이다. 청자는 어떤 적극적인 입장도 가질 수 없게 될 것이고, M은 청자가 판단할 수 있는 사안들의 범위 밖으로 슬그머니 빠져나가게 될 것이다. 「알리바이」는 청자를 모호한 태도로 몰아넣는다. 갈피를 못 잡는 경찰들은 이야기 속 피살자의 죽음을 일종의 추리 놀이의 계기로 전락시키면서, 자신들의 진실 게임 속으로 청자를 유인하고 있다. 그 게임 안에서 청자가 할 수 있을 법한 것들이란 기껏해야 피살자가 죽게 된 경위를 판돈으로 삼아 가벼운 호기심과 망설임을 즐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알리바이」는 청자가 내릴 수 있을 가능한 판단들로부터 M을 도주시킨다. 「알리바이」가 M을 위한 퇴로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M에 대한 판단의 가능성이 거기에서 완전히 차단되는 것은 아니다. 「알리바이」와는 달리, 「당신 발 밑」에서는 시신이 아직 땅 밑에 묻혀 있다. M은 시신 근처의 땅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초조해 하고 있다. 아직 경찰조차도 시신을 발견하기 전일 텐데, M은 고인이 어디에 묻혀있는지 알고 있는 눈치다. 그는 시신의 유기자로 생각된다. 더욱이 수색되고 부검되기 전 시신이 어떤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는지를 아는 이는 「네가 없다」의 M뿐이다. 「네가 없다」와 「당신 발 밑」의 청자들은 적어도 경찰들보다는 훨씬 많이 안다. 그러므로 청자들이 경찰들의 망설임 속으로 순순히 따라 들어가야 할 이유는 없다. M은 시신의 최초 발견자인 동시에 유기자다. 그는 살인자일 것이다. M의 유죄성은 「네가 없다」와 「당신 발 밑」을 거쳐 구성된다.

 

ㄴ. 모두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 얄리까지?

『Murder’s High』의 첫 번째 문제는 도망이기 전에 살인이다. 이 살인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눈코의 정규 앨범들은 적어도 한 곡 씩 죽이는 노래들을 싣고 있다.2 그 중 첫 번째는 「얄리는 내가 죽였다」다. 만약 죽이고 싶어 하는 노래, 또는 죽이려는 노래까지 같이 꼽는다면, 첫 번째가 「누나야」고 그 다음이 「얄리는 내가 죽였다」다.

「누나야」는 부모를 향한 아이의 적의를 자극적으로 쏟아낸다. 누나에 대한 부모의 학대가 암시된다. 누나를 혼내는 부모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아이는 심중에서 살의가 끓는 것을 느낀다. 부모를 모두 죽이고 누나와 둘이서만 살고 싶다. 그러나 노래는 살인 행위가 착수되는 장면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는 부모에게 겁을 먹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아비에 대한 공포가 강조된다. 「누나야」가 묘사하는 것은 도저히 도전해 볼 엄두조차 낼 수 없을 만큼 강고한 강제력을 향한 해소불가능한 분노다. 아비의 얼굴은 거꾸로 매달린 채로만 표상된다. 아이에게는 아비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볼 자신조차 없는 것이다. 아이는 자신을 압도하는 저 “커다란” 위력 앞에서 손 쓸 도리 없이 무력하다. 그러니 그저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이다. “모두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바라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았을 것인데, 죽이는 것이 쉬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나야」에서 죽이는 일은 너무도 어렵다.

그런데 「얄리는 내가 죽였다」로 넘어올 때, 무언가가 송두리째 뒤집힌다. 아이가 병아리떼를 죽였다. 얼마나 쉬웠을 것인가. 병아리들이 아이에게 저항이나 해볼 수 있었을 것인가. 아이의 자리가 바뀌었다. 병아리떼 앞에서, 아이는 더 이상 무서워서 벌벌 떠는 배역이 아니다. 아이는 병아리의 생사를 결정하는 강제력으로 돌변한다. 아이는, 아이의 엄마가 잠시 눈을 돌린 사이에 금방 한 무리의 목숨들을 모조리 죽일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위력이다. 물론 아이는 다른 자리에서는 여전히 미약하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도전할 자신은 없다. 그러니 거짓말로 둘러대는 것이다. 그러나 병아리들에 대해서라면, 아이는 충분히 강력하다. 병아리들은 아이보다도 훨씬 더 나약하니까. 이 노래에서는 죽이는 일이 거짓말보다 쉽다.

「누나야」와 「얄리는 내가 죽였다」는 가장 중요한 쟁점에서 서로 갈라지고 있다. 누가 누구를 죽이고자 했는가? 한 쪽에서는 무력한 이가 무서운 이를 죽이고자 한다. 그래서 죽일 수 없었다. 다른 한 쪽에선 무력한 이가 그보다 훨씬 더 무력한 이를 죽이고자 한다. 그래서 간단하게 죽일 수 있었다. 「누나야」의 살의는 가부장에 대한 도전의식이었다. 「누나야」는 아이가 생각할 수 있을 가장 강고한 권위에 대한 일종의 위반을 기도했다. 그러나 「얄리는 내가 죽였다」에서 죽임 당한 것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취약한 표적이다. 「누나야」에서 「얄리는 내가 죽였다」로 이행할 때 모든 것을 뒤집어 놓는 것은, 더 취약한 표적을 향해 하강하는 폭력의 구조다.

눈코의 죽이는 노래들은 동일한 폭력의 구조를 공유한다.

─ 「타이거 타운」. 호랑이를 죽일 생각도 없던 사람들이 “호랑이가 안전하다는 걸 알고 나서는” 호랑이를 사냥해 먹는다. 안전하다면 만만하다. 별다른 적개심이 없었는데도, 만만해지니까 죽인 것이다.

─ 「지구를 지키지 말거라」. 이 노래에서는 사정이 복잡하다. 아마도 아버지가 지구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던 중 어머니가 악당들 손에 잡혀 일찍 죽임 당한 모양이다. 슈퍼히어로를 감당하기 어려워 그의 아내를 인질로 잡는, 그런 종류의 에피소드가 암시된다. 지구를 위협하던 침략자들이 죽이고 싶어 했던 것은 아버지인데, 정작 그들 손에 죽은 듯 보이는 이는 어머니다. 여기에서 살의는 더 무섭고 강한 쪽으로 향하던 중 방향을 틀어 더 나약하고 취약한 쪽으로 비껴나간 듯 보인다. 죽임 당한 표적은 여자다. 처치하기 곤란한 남자를 죽이려던 폭력이 굴절되어 여자를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이와 같이 굴절된 폭력을 다른 경우와 비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의 「불행히도 삶은 계속되었다」는 남성 권위자를 죽이려 분연히 일어나서는 정작 자신보다 취약한 여성을 강간하는 폭력의 비열한 굴절을 재현하고 있다. 돈도 희망도 잃은 주인공이 삼키던 농약을 토해내며 복수를 다짐한다. 그런데 그는 김사장에게 복수하러 가는 길에 어처구니없게도 전 애인을 강간한다. 그는 김사장의 가족들 생각에 차마 김사장을 죽이지는 못했으면서도, 강간만은 피해자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중단하지 않는다.

─ 「아빠가 벽장」. 「아빠가 벽장」은 특별한 경우다. 아내가 남편을 죽이고는 그 시신을 벽장 속에 감췄다. 엄마는 저항의 위험이 상당한 표적, 결코 만만하지 않은 표적, 가부장을 죽였다. 근데 엄마가 아빠를 죽인 직후, 이 노래에서마저도, 더 쉬운 표적으로 하강하는 폭력의 구조가 반복된다. 아이가 골칫거리다. 죽은 남편이 벽장 속에 있다는 사실이 이웃들에게 알려지면 처지가 곤란해질 것이다. 가부장을 해치운 엄마의 폭력은 다시 형법의 권위에 부딪힌 뒤 아이에게로 굴절된다. 엄마는 아이에게 거짓말을 강요한다. 아빠는 영국에 가신 거야. 엄마는 자신이 가장 쉽게 압도할 수 있는 표적, 자신 앞에서 가장 취약한 표적일 아이에게 살인에 뒤따른 혼란의 짐을 떠맡겨 버린다.

─ 『Murder’s High』. 아마도 성인 남자인 듯 보이는 M이 자신의 애인이던 여자를 죽였다. 일반적으로 여성이 남성의 폭행에 저항하는 것은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더 어렵고, 으레 이는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그러니 애인이 자신보다 더 취약한 위치에 놓여있다는 상황은 그가 살해 행위에 착수하기 이전부터 이미 그에게 익숙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가 이 점을 명확히 인지했든 그러지 못했든, 남성과 연애 중인 여성의 일반적 취약성은 M의 살인을 더 쉽게 만들었을 것이다. M은 자신보다 취약한 표적을 죽였다.

문제되는 소재가 심각한 만큼 신중하게 써야 할 것이다. 한 편으로 여성은 폭력에 대해 항상 수용적이며 취약하기만 하리라고 쓰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여성이 일반적으로 취약하다고 쓰는 것과, 여성의 취약성이란 불가항력적인 것이라고 (곧 배반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이라고) 쓰는 것은 다르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여성의 저항가능성을 재발견하고, 그런 저항을 위해 활용할 수 있을 전략들과 수단들을 고안하거나 구체화하는 작업일 것이다. 우리는 맞받아칠 수 있는 여성을, 그러므로 위협적일 수 있는 여성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이 오직 취약하기만 하리라고 적는 것은 바로 그런 작업을 방해하며, 가능한 대항의 방식들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여성의 일반적 취약성을 누락하는 것은 저 작업의 긴급한 필요성을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위계가 M의 살인을 더 쉽게 만들었으리라고 적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 중요하다. 그와 같은 위계, 또는 여성혐오란 그런 종류의 폭력이 더 쉽게 행사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힘이다.

그러므로 『Murder’s High』의 죽이는 노래들은 첫 세 곡, 「알리바이」와 「네가 없다」, 그리고 「당신 발 밑」이다. 왜냐하면 그 노래들이 누가 누구를 언제 어떻게 죽였는가를 알려주기 때문이고, 죽임 당한 이가 죽인 이보다 취약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M의 살인은 취약한 표적인 여성을 향한 치명적인 폭력의 행사였다.

취약한 표적을 향해 하강하는 폭력의 구조가 쟁점이라면, 이 앨범의 문제는 M의 살인에만 그치지 않는다. 『Murder’s High』는 죽이는 노래가 아닌 다른 노래에서도 같은 구조를 반복할 것이다. 「나 혼자 먹어야지」에는 다짜고짜 밥상을 뒤집는 아빠 앞에 선 아이가 나온다. 여성의 자리에 아이가 온다. 가부장의 이해할 수 없는 분노가 아이를 다그친다. 이 노래에서도 폭력은 ─설사 치명적인 (곧, 죽이는) 폭력이 아니더라도─ 여전히 끔찍하고 저열하며 강권적이다.

 

ㄷ. 변명들

M은 살인자다. 사안은 무겁다. 그런데 「알리바이」와 「네가 없다」의 연주에서는 가사가 이야기하는 사안의 무게를 존중하려는 기색이 느껴지지 않는다. 리듬만 놓고 보면 이 두 곡은 펑크funk 트랙이다. 첫 곡의 건반은 유난스레 들떠 있거니와 끝에 가면 심벌과 베이스가 1분 넘도록 요동을 칠 것이다. 모든 것이 무게를 덜어내는 중이다. 이윽고 「네가 없다」의 드럼이 첫 번째 코러스를 예고하기 위해 짤막한 솔로 무대에 오르면, 모든 것이 너무 짜릿해진다. 사람이 죽은 마당에서도 베이스와 드럼은 춤을 추고 신스는 뛰어다닌다.

무게 잡는 이야기와 경박한 연주 사이의 부조화는 『Murder’s High』의 죽이는 노래들이 공유하는 성격이다. 「당신 발 밑」은 그것을 연주가 이야기에 대해 띠는 외면적 이질성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연주 내부의 차이로 가져온다. 레게리듬을 타고 들썩이는 기타는 느긋하게 즐기기 좋은 그루브를 만든다. 그리하여 눈코는 이 노래를 위한 간단한 율동을 짤 수 있었다. 리듬기타는 박자에 맞춰 팔을 휘저으며 발을 움직일 수 있도록 규칙적인 스트로크를 들려줄 것이다. 반대로 노래가 시작하고부터 들리는 건반의 아코디언 음색에는 다소 처연한 구석이 있다. 뒤로 가면, 우선 두 번째 코러스가 끝난 뒤 리드기타가 한 번, 그리고 노래가 끝날 때쯤 아코디언/건반이 한 번, 이렇게 둘이 번갈아가면서 청승을 부릴 것이다. 리듬악기들과 선율악기들은 각자 상이한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 한 편에서는 춤을 권하는데, 다른 한 편의 무리는 마치 넋두리라도 하려는 기세다. 이렇듯 「당신 발 밑」의 연주는 가사와의 차이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차이를 겪고 있다. 

사실 이런 식의 이중적 차이를 빚어내기로는 「네가 없다」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없다」의 그루브는 단지 가사의 심각성 뿐 아니라 사뭇 진지한 체하는 깜악귀의 목소리와도 어울리지 못했다. 마치 한숨 쉬듯 노래하는 보컬이 잔뜩 무게를 잡고 있던 것과는 달리, 리듬은 태연하게도 가벼웠다. 여기에서도 한 편은 춤을 추고 있었는데 다른 한 편은 비탄이라도 쏟아내는 듯했다.

「알리바이」와 「네가 없다」, 그리고 「당신 발 밑」은 그러므로 불합치에 의해 규정되고 있는 셈이다. 이야기되는 내용으로서의 가사와 그것의 표현 방식으로서의 연주 사이의 불합치, 또는 이야기의 내용에 스스로를 적응시키려는 표현과 내용으로부터 자립해 있으려는 표현 사이의 불합치가 저 세 노래들을 내부에서부터 분열시킨다. 노래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진다. 저 세 노래들의 리듬은 가사의 내용을 이루는 M의 살인과 M이 자신에 대해 취하는 태도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킨다.

세 노래들의 연주가 여성혐오 살인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하도록 유인하는 장치인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피살자에게 가해진 불의를 살인자 측에서 꾸며내는 진지함으로 대체하려는 이야기의 진행을 방해하는 장치다. 이야기는 이미 피살자에 대한 관심을 철회했다. 연주는 이제 살인 사건의 무게에 자신을 맞출 수 없다. 이야기가 서둘러 그 사안을 치워버렸기 때문이다. 저 곡들에서 연주가 존중하지 않는다는 사안이란, 살인이 아니라 살인자의 태도다.

「네가 없다」에서부터 이야기되는 것은 자신의 유죄성으로부터 달아나려는 M의 변명이다. M은 누구보다도 자기 스스로를 가엾게 여기고 있다. M은 죽은 애인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감을 토로한다. M은 스스로가 처한 상황을 애틋한 사별로서 조망하는 입장에 서 있다. 이야기의 중심에 자리한 사안은 M이 어떤 곤란을 맞았으며 또 무엇을 잃었는가에 관한 문제다. 그것이 M이 무엇을 했는가에 관한 문제를 말소시켰다. 그러니 M의 퇴로는 「알리바이」 뿐만이 아니다. 「네가 없다」와 「당신 발 밑」은 한 편으로 청자들에게 M이 살인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지만, 또 한 편으로는 M의 변명을 받아 적고 있다. 저 두 노래들로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M은 자신의 유죄성을 외면하고, 자신의 슬픔과 불안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허나 연주의 경박함만은 M이 사뭇 진지한 어조로 쏟아내는 자기연민에 대해 독립적인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Murder’s High』의 첫 세 곡에서 이야기의 기만적인 비탄조와 부조화를 겪는 리듬은 M의 방백에 실린 음울한 무게에 대립한다. 이 불합치를 통하여 저 노래들은 「네가 없다」와 「당신 발 밑」의 이야기를 장악한 M의 관점으로부터 달아난다. 연주는 (또는 연주의 한 축은) 이야기로부터 스스로를 이격시키고 있고, 그럼으로써 M의 변명에 연루되기를 거부하고 있다.

『Murder’s High』는 바로 이와 같은 불합치를 포기할 때 최악이 될 것이다. 문제는 「뭐뭐뭐뭐」다. 여기에서 노래는 이야기가 재현하는 M의 말과 연주 사이의 거리를 제거함으로써, 곧 자기 자신과의 거리를 제거함으로써 M의 관점에 편승하게 될 것이다.

「뭐뭐뭐뭐」에서 M은 노골적이 된다. 누구 한 명 해치지 않고 살아왔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이제 내가 꾸려온 건실한 삶은 무너졌고 무엇을 해야 할지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든 것이 불안하다. 나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그런 나에게 이토록 갑작스런 불행이! M은 그렇게나 선량하다는 자신의 심성에 기대어 자신의 행위를 은폐한다.

M은 여전히 자신의 상실감과 불안감만을 본다. 「아침이 오면」은 그가 겪고 있는 좌절을 강조하고 있다. 좌절 속에서 그는 변명의 구실을 찾는다. 「하나 둘 셋 넷」에서 그것은 심지어 죽은 이에 대한 모종의 원망으로 드러난다. 너는 처음과는 너무 달라졌어, 네 눈빛은 너무 싸늘해졌어, 너는 날 피하려 들었어…. 그는 마치 피살자 편에 살인의 이유가 있었다는 식으로 말하려는 것 같다. 피살자가 안겨준 상처로 인해 별안간 자신의 삶이 일그러지게 되었다는 식으로 말하려는 것 같다. M은 마치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은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 같다. 진부하면서도 끔찍한 변명들이 추악하게 쏟아진다. M은 곤란에 처한 자신과의 일체감 속에서 오직 자신만이 비참한 줄로 안다. 그것이야말로 견딜 수 없이 역겨운 점이다.

「뭐뭐뭐뭐」의 이야기가 M의 입장에서 서술되지는 않는다. M의 변명을 들어주는 새로운 입장이 등장한다. M은 자신의 불안을 토로하기 위해 누군가를 불렀고,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처지를 늘어놓는다.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의 입장에서는 도리어 M이야말로 억울한 이로 보일 것이다. 이야기는 M의 입장 바깥에서도 M의 입장이 뜻했던 바를 성취한다. 피살자에게 가해진 잘못은 누락되고, M 자신의 곤란만이 남는다.

연주는 갑작스레 차분해진다. 「아침이 오면」의 아웃트로와 「뭐뭐뭐뭐」의 인트로 사이의 격차는 크다. 비트는 부드러워지고, 어쿠스틱 기타 리프가 흐른다. 벌스 부분의 연주는 M과 그의 대화자 사이에서 감돌 법한 처연하면서도 조심스런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한다. 연주는 M의 비탄조에 달라 붙어 있다. 코러스에서 조금 더 부산하고 조금 더 강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의 불안감을 호소하는 M의 감정이 고조됨에 따른 변화다. M이 혼란해 할수록 연주도 거칠어지는 것이다. 연주는 M의 호소와 착실하게 맞물리고 있다. 여기에 깜악귀의 가창도 이 둘의 조화를 따라간다. 목소리는 벌스에서는 가라앉아 있고, 코러스에서는 당혹감을 내비친다. 모든 것이 처연하게 들린다. 연주와 가창은 가사의 내용과 통일되어 있다.

음악은 「뭐뭐뭐뭐」에서야 비로소 하나가 된다. 내용과 표현은 서로 합치한다. M은 성공한다. 연주는 그의 변명과 멀어지기를 포기한다. 이렇게 하여 M의 입장만을 관심사로 삼는 이야기가 끝내 승리를 거둔다. M의 변명을 중심으로, 연주와 가창과 이야기가 통합된다. 피살자를 누락시킴으로써 이룩되는 통합. M과 이야기와 연주와 가창이 하나 되어 피살자를 몰아낸다.

여기에서부터 문제는 도망이다. 첫째로 이야기가 M을 그 자신의 죄책감으로부터 도피시키고 있다. 둘째로, M은 여전히 경찰이 자신에 대한 의심을 철회했는가를 확신하지 못하며, 따라서 자신을 뒤쫓지 않는 그들로부터 도망치고자 한다.

 

ㄹ. 밀항선, 또는 어째서 『Murder’s High』는 UFO를 모르는가?

M은 새 삶을 계획한다. 「성형 수술을 할래」는 계획의 첫 번째 단계다. 우선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얼굴을 바꾸겠다. 그러나 성형수술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M은 아예 다른 땅으로 도망하고자 한다.

뒤이어, 배 등장. 언뜻 보기에 「그 배는 내일 침몰할 거예요」는 엉뚱한 이야기로 생각될 것이다. 마치 M의 이야기가 새로운 바닷가 마을 이야기로 교체되는 것만 같다. 「나 혼자 먹어야지」는 그 바닷가 마을에서 지내는 아이의 생활을 짤막하게 묘사한다. 예지몽을 꾸는 아이는 눈앞도 보이지 않을 밤바다에 직접 뛰어들어 낚시를 할 정도로 신통한 인물이다. 바다의 무속적 신비를 주제로 하는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려는 것일까?

그러나 「성형 수술을 할래」 바로 뒤에 「그 배는 내일 침몰할 거예요」가 온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어째서 배는 <페이스 오프> 계획을 뒤쫓아 무대에 오르는가? 아주머니는 위험한 줄 알면서도 먼 바다로 떠날 것이다. 아이도 말리고 아저씨도 말리는데 배를 타야 한다. 일만 잘 되면 한동안 잘 풀리리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꽤 큰돈이 되는 일을 하러 나가는 듯하다. 위험하고, 멀리 나가고, 큰돈 되는 일. 조업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성형수술로 신분을 감추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선언에 뒤따르기에는, 조업보다는 밀항이 더 그럴듯하다. 

그러므로 「그 배는 내일 침몰할 거예요」와 「나 혼자 먹어야지」에서 이야기가 일관성을 포기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성급한 일이다. 이 배는 밀항선일 수 있다. 살인자가 밀항자가 되려는 것일 수 있다. 이 배는 아무도 알아볼 수 없도록 얼굴을 갈고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다른 나라로 몰래 떠나서 새 삶을 살겠다는 계획의 일부일 수 있다. 「성형 수술을 할래」와 「그 배는 내일 침몰할 거예요」를 이어놓는 수록곡들의 순서는 이 배를 밀항선으로 생각하라고 요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왜 배인가?

눈코의 노래들에 나오는 탈 것들이라고는 이 밀항선과 우주선뿐이다. 「영국으로 가는 샘이」에 공항이 나오긴 하지만 비행기는 나오지 않는다. 「하이웨이 몽키스타」와 「지옥에 가다」에 고속도로와 교통사고가 나오긴 하지만 차는 나오지 않는다. 「사랑의 응급환자 삐뽀삐뽀」에서는 병원도 나오고 사이렌도 나오지만 정작 응급차는 나오지 않는다. 「변신로봇대백과」에 타고 다니는 로봇이 나오긴 하지만 이 로봇은 장차 은하를 누빌 테니 우주선이라고 보아야겠다.

눈코의 정규앨범들 중 우주선이 등장하지 않는 유일한 경우는 『Murder’s High』뿐이다. 『Pop to the People』와 『Tales』에는 우주선이 있었다. 우주선은 『스카이랜드』에서도 되돌아올 것이다. 오직 『Murder’s High』만이 우주선에 관해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Murder’s High』에 배가 나온다는 것은 예외적인 경우다. 왜 우주선이 아니라 밀항선인가? 왜 『Murder’s High』에는 UFO가 없는가?

UFO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UFO의 기능을 중심으로,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네 가지 노래들 사이의 일관적 관계를 구성해 볼 수 있다.

「외계인이 날 납치할 거야」의 주인공은 미몽에 시달리는 도망자다. 그 미몽이란 총체적으로 합리화된 세계가 허용하는 유일한 미몽, 과학과 대립하기보다는 과학과 타협하는 미몽, 곧 외계 침공의 시나리오다. 「외계인이 날 납치할 거야」의 세계는 이미 너무도 합리적인 체계여서, 돌이킬 수 없을 파국 속에서조차 언론 보도가 멈추지 않을 정도다. 도망자는 과학적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가장 멍청한 상상에 의존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현실의 관료적인 체계로부터는 어떤 관심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 현실적 절차들에 접근하는 일보다는 차라리 외계인에게 접근하는 일이 훨씬 더 쉽다. 그리고 사실 저 절차들은 UFO만큼이나 멀찍이 떨어져 있던 것이다. 그는 오직 상상 속에서만 저 절차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외계인이 […] 국가의 중요한 인물이 될 나를 납치할 거야.” 게다가 정부와 국회의 대다수 인사들은 외계인들이었다지 않는가! 그러니 도망자의 편에서 보자면 합리성의 체계란 전부터 이미 외계였고, 반대로 합리화된 관료체계의 편에서 보자면 이제야 그 체계 밖으로 달아나려는 듯 보이는 도망자야말로 전부터 이미 체계 내부의 외부자였다. 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아 헤매다 UFO를 향해 달아나는 요제프 카.

『Tales』는 외계와 현실적 삶의 형식들 사이의 거리를 측정한다. 「엄마 몰래 Space」에서 외계는 이미 일상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길에서 넘어져 창피할 때 곧바로 외계로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고, 엄마 눈을 피해 놀러 나가듯 그렇게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늘은 UFO」에서, UFO는 이미 모두의 삶의 공통적 현실에 들어와 있다. 누구나 고개만 들면 UFO가 보일 것이다. 천장 위 UFO가 추락할 때, 그들 삶은 끝장난다. 땅 위의 일상은 UFO를 먼 곳에 두는 한에서 존속하며, 그런즉 UFO와 땅 사이의 거리에 의존하는 것이다. 외계는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땅으로부터는 분리된 것이어야 하고, 설사 언제든 오갈 수 있는 곳이라 하더라도 엄마 눈에는 보여선 안 된다. 마치 엄마의 시선이 UFO와 땅 사이의 거리를 벌리고 있는 듯이 보인다. 더 합리적이며 책임에 충실하리라고 가정된 권위(엄마)는 이미 일상 안에 들어와 있던 외계를 일상에서 축출하는 힘이다.

「마더쉽」은 현실과 외계 사이의 관계를 두 번에 걸쳐 전도시킨다. 먼저 모선으로부터 떨어져 고립된 외계인의 편에서 볼 때, 지구는 그가 적응할 수 없는 외계다. 이 행성의 모든 것이 그에게는 너무도 가혹하다. UFO는 그 끔찍한 외계 한복판에 내려앉았다. 그런데 또 다시 지구의 편에서 볼 때는 그가 탄 우주선이야말로 수용불가능한 외계다. 인간 삶의 일반적 조건들은 외계로부터의 침입을 부지불식간에 금지한다. 이를테면 「마더쉽」의 외계인에게는 고도의 기술공학 뿐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들부터가 위협이다. “저들의 신호를 이해할 수가 없네요.” 외계인은 무슨 특별한 종류의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를테면 사람의 말, 눈, 혀, 바다로 뒤덮인 지구의 푸른 빛, 중력 등에 겁을 먹고 있다. 일상적인 의사소통과 표현들은 마치 지리적 환경처럼 도처에 편재하는 장애물이다. “다만 가장 일상적인 것이 지구와 같은 무게를 갖고 있을 따름이다.”3 시민적 삶의 공통 형식들은, 이미 그 형식 안에 외부가 들어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곧 외계인이 이미 지구 대기권 안에 들어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식 내부에 적응할 수 없는 외부를 자동적으로 배제한다. 배제란 저 공통 형식의 항구적이고 일반적인 기능이다. <디스트릭트 9>에서는 게토를 에워싼 철조망으로 험악하게 가시화되었던 폭력이, 「마더쉽」에서는 공기처럼 자연스럽다.

눈코의 UFO는 배제가 작동하는 방식을 체험하고 기술하기 위한 탐사선이다. 그것은 사회가 도망자들을 생산하는 과정을 관찰하는 비판 장치다. 사회는 자기 내부의 외부자들이 도망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도록, 도망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도록 조직되었다. 누군가를 내몰고 도망치게 만든다는 것은 심지어 사회의 정상적 상태이며, 그렇기에 무서운 것이다. 그것은 가장 평범한 상황에서도 끔찍하리만치 가혹하다. 그것이 UFO의 보고 결과다.

그러니 UFO의 관찰일지에 『Murder’s High』는 어울리지 않는다. 눈코의 노래들에서 UFO의 기능은 비판이며, UFO에 고유한 비판이란 합리화된 배제에 대한 비판이다. 비판은 자신이 비판하고자 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무기를 취해올 때 가장 강력하다. 그러므로 허공에 대고 빈말을 적어내릴 것이 아니라면 UFO는 자신의 관찰 대상 내부에서부터 비행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Murder’s High』에서는 UFO의 비판에 적합한 소재를 찾아볼 수 없다. 『Murder’s High』는 배제가 어떻게 생산되는가에 대해 또 배제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 배는 내일 침몰할 거예요」와 「나 혼자 먹어야지」가 단지 빈곤과 배제의 결과들만을 피상적으로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아주머니는 아이와 함께 있기 위해 먼 바다로 나가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아주머니가 바다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배는 내일 침몰할 거예요」는 배제가 작동하는 방식, 또는 빈곤이 재생산되는 방식에 대해 어떤 것도 기술하지 않는다. 바다에 대한 막연하고 무속적인 공포만이 강조될 뿐이다. 「나 혼자 먹어야지」 또한 아이가 겪고 있는 고립을 단편적으로만 암시할 뿐이다. 이 노래 또한 고립을 생산하는 과정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술하지 않는다. 요컨대 『Murder’s High』에는 UFO를 위한 이착륙장이 마련되지 않았다.

『Murder’s High』가 UFO를 올리기에 적합한 무대였다면 사정이 조금 더 나았을까? 만약 UFO가 M을 위하여 등장하기라도 했다면, 『Murder’s High』는 훨씬 더 나쁜 경우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 때 『Murder’s High』는 M이 왜 도망자로 만들어졌는가, 곧 왜 그가 살인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는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해야 했을 것이다. 그 때 살인은 여성혐오적 위계에 의해 준비된 M의 행위가 아니라, 다른 어떤 사회적 배제의 부산물로 조명되었을 것이다. M은 도리어 가혹한 체계의 피해자가 되었을 것이다. UFO는 M을 위한 변명거리 중의 하나로 전락했을 것이며, 비판은 스스로 기만이 되었을 것이다. 기어이 세상이 나를 살인자로 내몰았다는 둥의 변명까지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애초에 『Murder’s High』에는 UFO를 올리지 않는 편이 더 낫기도 한 것이다.

밀항선은 UFO 같은 비판 장치가 아니다. 밀항선은 충분히 관찰하지 않는다. 밀항선은 충분히 기술하지 않는다. 내재적 관찰과 기술 없이는 비판도 없다. 그리하여 밀항선은 아무것도 비판하지 못한다. 밀항선은 그저 M의 도주 수단일 뿐이다. 『Murder’s High』는 비판을 모른다. 그렇다면 『Murder’s High』는 이야기를 그저 내버려두어야만 하는가? 이대로 이야기가 제 결말을 맞이하도록 손 놓고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이 저열한 이야기가 일관된 의미연쇄를 완결하도록 흘려보낼 것인가? 혹여 아이가 꾼 꿈대로 밀항선이 침몰하기라도 한다면, 그 땐 정말이지 골치 아프게 될 것이다. 기어코 이야기가 신비로운 교훈으로 스스로를 치장하는 지경까지, 이를테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가는 배타고 도망가는 길에 바다에 빠져 죽는답니다, 따위의 진부한 결말을 성취하는 지경까지 놓아둘 것인가?

그러나 『Murder’s High』는 이야기를 수수방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Murder’s High』는 이야기를 날려버린다. 『Murder’s High』는 스스로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스스로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다. 「일렉트릭 빔」은 우악스런 폭발을 선호한다. 비판 장치로서의 UFO가 자리를 비운 무대에 갑작스레 난입하는 일렉트릭 빔과 금속 미사일. 파괴 장치들 등장. 무대를 주저앉힌다. 다음 지문은 없다. 무대 위에 있던 그 무엇도 무대 뒤편으로 퇴장할 수 없다. 극장은 터져버렸으니까.

 

ㅁ. 미네르바와 더블케이의 서울 폭격 삼십삼 초: 결말에 반하여

이야기라는 것이 만약 하나의 총체라면, 곧 마지막 문장이 전체의 의미를 결정해야 하고, 또 그렇게 완결된 전체가 자신의 부분적 계기들 각각의 의미를 다시 규명해야 하는 하나의 순환이라면, 「일렉트릭 빔」에서 『Murder’s High』는 스스로 이야기이기를 포기하는 셈이다. 「알리바이」에서부터 「뭐뭐뭐뭐」에 이르기까지 사태들 사이의 연관이 포기되지 않았었다 한들 마지막 사태가 그 연결로부터 유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완성된 전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아볼 수 없게 된 마당에 하물며 전체 의미연관과 부분적 계기들 사이의 순환 같은 것을 추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렉트릭 빔과 금속 미사일이 M의 도주극을 결딴내버렸다.

지금 막 미네르바와 더블케이가 이야기를 터뜨려버린 참이다. 이제 변명은 없다. 변명할 곳이 없어졌으니까. M도 밀항선도 온데간데없다. 그리하여 『Murder’s High』의 골자였다고 이를 만한 것이 허물어져 내렸다. 미네르바와 더블케이의 전자기 방어막은 무엇보다도 앨범을 통째로 집어삼키려 드는 하나의 이야기를 막아내기 위한 바리케이드였을 텐데, 그 안에서 우리는 이야기의 결말을 거부하려는 몸부림을, 곧 이야기가 이야기로서 완결되는 것을 거부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들었다. 이야기가 스스로를 끝내기 전에, 이야기가 가닿고자 하는 끝이 오기도 전에 모든 것을 끝장내버리기. 나는 끝났다는 것과 끝장났다는 것을 구분하고 싶다. 끝났다는 것은 이뤄냈다는 것이다. 끝장났다는 것은 망했다는 것이다. 『Murder’s High』는 끝을 보지 못하고 끝장났다. 「일렉트릭 빔」은 『Murder’s High』를 폭파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돌이킬 수 없을 분열, 회복불가능한 탈구! 「일렉트릭 빔」은 끝장냈다는 점에서 발본적이며 급진적이다. 끝까지 스스로를 진행시키려는 이야기의 사정거리 밖으로 달아나기. 도주극으로부터 도망치기. 이야기를 터뜨려버림으로써 그렇게 하기. 미네르바와 더블케이는 다급하고 우스꽝스럽게,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만들다 말았다. 급기야는 자신들의 손으로 새로이 지어내려는 양 시늉하던 이야기마저도 얼렁뚱땅 망가뜨려버리기.

죽기 전 더블케이가 <왓치맨>의 오지만디아스를 흉내 내려 들기는 했다만, 그가 궁색하게 짜낸 폭격의 명분은 무시해도 좋다. 생존자들이 기억할 것이라는 둥의 유언을 진지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깜악귀의 경박한 목소리 덕에, 데블케이의 궤변은 아무리 들어도 우스개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폭발을 향한 갈급하고도 맹목적인 열정. 이 폭력에 무슨 구조니 하는 것은 없다. 맹목성과 무의미성만이 있을 뿐이다. 불합리하기에 무차별한 폭력이 단호히 서울 하늘을 가르며 쏟아졌을 제, “슈웅, 파아아.”

두 가지 평가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 『Murder’s High』는 이미 자신의 이야기 속 피살자에 대해 잘못을 저질렀다. 이야기는 피살자를 누락시켰다. 곧 이야기는 여성을 누락시켰다. 이미 이야기는 더 나빠질 수 없을 만큼 나빠져 있었다. 이야기는 살인자의 입장에 감화되었고, 그의 변명 아래로 모든 것을 통합시켰다. 「뭐뭐뭐뭐」는 자신이 들려주는 모든 것을 M의 이야기 안으로 흡수시켰고, 『Murder’s High』에 대한 내재적 비판은 진즉에 불가능해졌다. 이 지경까지 이르러서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것은 이야기가 의미연관으로서 가지는 권리를 인정해주는 일이 될 것이며, 그렇게 결정될 의미란 것도 유치한 교훈에 지나지 않거나 살인자가 은밀히 즐기는 자기연민에 그칠 뿐이다. 그러니 어느 쪽으로 향하든 이야기의 결말은 피살자에 대한 또 하나의 잘못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파괴되는 편이 낫다. 폭격은 피살자-여성을 누락시킨 이야기의 마지막 폭력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 「일렉트릭 빔」은 무책임하다. 피살자-여성의 누락에 대해, 『Murder’s High』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했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 『Murder’s High』가 이야기이기를 포기했다는 것, 또는 미사일과 빔으로 자기 이야기를 해소해버렸다는 것은, 『Murder’s High』가 이야기에 대한 책임을 방기했다는 것이다. 피살자의 권리가 회복될 기회마저도 이야기와 함께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일렉트릭 빔」에서 『Murder’s High』는 스스로의 책임으로부터 달아났다.

  1. “코르타사르는 어디에선가 자신이 읽고 있는 소설 속 인물에게 암살당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서술한다. 이는 고전주의자들이 저자의 메타렙시스라고 불렀던 서사적 문채의 전도된 (그리고 극단적인) 형식이다. [……] 서술자나 이야기 바깥의extradiégétique 피서술자가 이야기의 세계 안으로 난입하는 (또는 이야기 속 인물이 하나의 메타이야기의métadiegietique 세계 안으로 난입하거나 하는 등의) 모든 [경우], 혹은 코르타사르에게서처럼, 그 반대로 [이야기 속 인물이 이야기 바깥의 세계로 난입하는 경우는], 익살맞거나 […] 환상적인 기묘함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서사적 메타렙시스라는 용어를 그러한 모든 위반들에로 확장시킨다.” G. Genette, Figures III, Le Seuil, Paris, 1972, 244p.
  2. 죽는 노래들은 죽이는 노래들보다 더 많다. 죽이는 노래들을 죽는 노래들에 포함시킬 때, 눈코의 죽는 노래들을 셋으로 나눌 수 있겠다. 첫 째로 자살을 예고하거나 실행하는 경우. 「영국으로 가는 샘이」, 「별이 되었네」, 「니가 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 「우리 집은 화목한데」, 「스카이워커」. 둘째로 사고나 재난으로 죽는 경우, 또는 그런 죽음을 예고하는 경우. 「지옥에 가다」, 「그 배는 내일 침몰할 거예요」, 「종말의 연인」. 마지막이 죽이는 노래다. 그러나 분류하기 어려운 경우들이 있다. 첫 째로 「지구를 지키지 말거라」. 「지구를 지키지 말거라」는 죽이는 노래일 수도 있고 사고나 재난으로 죽는 노래일 수도 있다. 문제는 유언을 남기고 떠난 아버지가 아니라, 너무 일찍 죽었다는 엄마다. 분명 지구를 위협하는 악당 때문에 죽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게 악당 때문에 일어난 재난이나 사고 때문인지 아니면 악당에 의한 직접적인 살인인지 식별하기 어렵다. 그런데 누군가 악당이 초래한 재난에 휘말려 죽었다면, 악당이 자기 손으로 직접 그의 숨을 끊었든 아니든, 악당이 그를 죽였다고 말하는 것은 썩 무리한 주장이 아닌 듯 보인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지구를 지키지 말거라」를 죽이는 노래로 분류한다. 둘째로 「일렉트릭 빔」. 더블케이는 자살한 것이나 다름없다. 갑작스런 폭격은 재난이나 다름없다. 서울시민들은 살해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나는 이 노래를 하나의 예외로 취급한다.
  3. W. 벤야민, 카프카와 현대, 최성만 역, 길, 2020, 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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