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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st : 2020 국내 베스트 앨범 20 by XENITH

 

2020년은 이미 진작에 끝났지만, 한 번 더 2020년의 음악을 들고 인사드리게 되었습니다. 리스트를 공개하기에 앞서 많은 말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비록 저의 리스트가 “베스트 앨범”이라는 미명 하에 쓰여진 것이기는 하지만, 독자 여러분들이 본고를 읽으심으로 하여금 여러분들 마음 속에서 밝게 빛나던 별들을 떠올려보셨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보고자 했습니다. 따라서, 소개합니다. 지난 한 해 저의 마음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던 20개의 별들입니다.

   

* 본고는 필진 XENITH 개인의 2020년 결산으로서, 웹진 <온음>의 총결산과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 본고에서 소개되는 작품들은 모두 2019년 12월 1일과 2020년 11월 31일 사이에 발매되었습니다.

* Honorable Mentions는 아티스트명을 기준하여 가나다/알파벳 순으로 소개합니다. 또한, 리스트 내의 순위와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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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orable Mentions

 
그냥노창, 『춤추자』, 린치핀뮤직, 2019.12
   
김심야, 『Dog』, BANA, 2020.11
   
넉살, 『1Q87』, VMC, 2020.09
   
안다영, 『ANTIHERO』, Self-Released, 2020.11
   
Deepflow, 『FOUNDER』, VMC, 2020.04
   
DPR LIVE, 『IS ANYBODY OUT THERE?』, DPR, 2020.03
   
Swervy, 『Undercover Angel』, Hi-Lite Records, 20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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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st

   
   

소음 즉, 노이즈 자체는 우리가 살면서 수없이 마주한 바 낯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대중음악의 영역으로 들어왔을 때, 레코드에 삽입되기 위한 일련의 가공과 제어의 과정을 거쳤을 때는 어떻게 다를까. 이 질문은 극단적으로 소음만을 수집하는 노이즈 장르의 작품, 장희진의 『Dream Signal』에도 곧바로 적용되는 사항이다. 물론 소음의 사전적 정의에서 말하는 시끄러움이란 반드시 큰 음량과 듣는 이를 기분 나쁘게 하는 속성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노이즈 작품에서의 노이즈는, 당신이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을 소리만이 담겨 있는 관계로, 처음에는 반드시 폭력적이다. 만일 본작을 듣는 당신이 이 장르에 관해 내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폭력적인 소리의 파도를 견뎌낼 수만 있다면 약간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령 「Colors: I’m here!」에서의 Oneohtrix Point Never의 「Nassau」를 떠오르게 하는 키치적인 터치라던가, 「수혈」에서 엿보이는 나름의 완급 조절을 꾀하는 전개 방식이 그렇다. 내가 본작을 감상한 방식은 장희진이 제시한 방식과 같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반복적인 재생을 통해 자신의 역치를 한껏 높이고 감상하는 본작은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다른 소리로 다가올 것이기에, 한 번쯤 들어봄직한 작품으로 본작을 소개하려 한다.

       
   

새삼스러울지도 모르겠으나 고백하자면, 나는 대중음악 작품을 사회정치적인 접근을 통해 해석하는 것―혹은 그러한 해석을 무리하게 덧대려는 것―을 그렇게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사유하는 대중음악은 거대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 예속된 요소로서, 적지 않은 작품들에 관하여 실로 그러한 해석만이 유효할 때가 있으며, 이것은 대중음악평론에서 순전히 음악 이야기“만” 다룰 수 없는 이유로도 작용한다. 그러한 작품은 오랜 기간에 걸쳐 수없이 제출되어왔고, WeWeWe 기획단의 주도로 탄생한 우리나라의 『We, Do It Together』 역시 그러한 작품 중의 하나다. 본작은 국내 최초의 여성 록 컴필레이션 앨범으로서, 애리, 에고펑션에러, 향니, 다브다, 카코포니 등 국내 유수의 아티스트가 참여하였다. 이들이 각기 다른 음악적 지향점―단순히 장르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듯,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대로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아냈다. 이것은 coloringCYAN이 말했듯 여성의 연대란 서로 다른 여성 주체들의 차이가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지 각기 다른 여성들의 차이를 동질화하려는 시도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본작은 개개의 트랙으로서도 특색이 있는 앨범일 것이지만, 굳이 트랙의 면면을 하나하나 짚어보며 설명하지 않더라도 이미 본작은 그 자체로 기록적인 측면에서의 가치가 있다.

       
   

『Slow Dance』라는 타이틀, 드레스를 입고 몸을 비트는 한 사람―아슬 본인―의 모습이 담긴 다소 낮은 화질의 아트워크부터 본작의 지향점은 명확하다. 느린 템포에 맞추어 춤을 추는 사람, 그러한 피사체에 적절히 어울릴 음악들이 그것이다. 이미 반쯤 예상되는 것이었지만, 소리 역시 아주 직관적으로 다가오며 나의 생각에 설득력을 더한다. 리버브를 활용하고, 적당히 가벼운 신스를 패드로 활용하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점에서 일관적일 프로덕션은 드림 팝, 시티 팝 등에서의 소리를 떼어내 다시금 그녀의 색채에 맞게 연성하는 과정을 연상케 한다. 때로는 사이키델릭하게(「잠」, 「Sunday Morning」), 때로는 박자감이 느껴지게(「Bye Bye Summer」, 「2 Weeks」) 트랙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그 방식도 꽤 다양한 덕에, 우리가 본작의 소리에서 2년 전의 백예린을, 혹은 2010년대 초반의 Beach House를, 때로는 Troye Sivan이나―조금 강렬하지만―Roosevelt를 떠올리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팝 아티스트들이 레퍼런스와 자신의 색채를 적절히 저울질 하는 것이 이제는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그녀의 저울질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명확한 지향점을 가지고 진행된 이유로 조금은 결이 다를지도 모르겠다. 본작은, 많은 면에서 성공적인 선택들로 가득한, 순도 높고 매력적인 신스 팝 EP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대개 타인과의 관계에 관하여 이야기되어 왔고, 그것은 굳이 인문학적인 서술을 들이밀지 않더라도 오랜 기간, 그리고 아주 쉽게 중요한 가치 중 하나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타인을 향한 사랑 못지 않게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 중 하나가 자기애가 아닐까 싶다. 김뜻돌의 『꿈에서 걸려온 전화』는 자기애를 구축하고, 그것을 되물으며,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재확인하는 과정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 아트 팝과 드림 팝, 모던 록 등 다양한 영역을 영민하게 오가는 본작에서 김뜻돌이 화자인지 수신자인지는 시종일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그녀는 이 전형이 없는 본작에서 청자 역시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보길 요청하는 듯이 보인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되묻는 「이름이 없는 사람」, 자신이 누군가에게 행복이 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나빗가루」, 자신과 타인을 향한 사랑의 존재를 짚어보는 「실패하지 않는 사랑이 있나요」와 「샤워를 해야해」 등이 그러한 의도 아래에서 작성되었을 것이다. 나아가 본작의 하이라이트인 「삐뽀삐뽀」는 우리의 삶과 죽음이 갖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엄함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의도를 한층 고양된 형태로 드러내는 트랙일 것이다. 본작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그러한 보편적 가치의 의미를 되짚는 과정을 아름답고 재치있게 풀어냈다는 사실인 것이다.

       
   

물론 전자음악은 컴퓨터 기술과 함께 나날이 발전하는 신시시즈의 산물로서 그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영역이지만, 주류에서 그 거리가 점점 멀어질수록 사람들의 시선이 닿을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낮아지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런 비주류의 영역을 지평으로 삼는 이들에게 타 아티스트와의 협업은 몇 되지 않을 기회이자 장이며, Keiiti Aki의 주도로 진행되는 컴필레이션 프로젝트의 두 번째 결과물인 『Leg-Quency』 역시 그러한 배경을 갖는 작품이다. 본작의 타이틀은 다리를 뜻하는 Leg와 주파수를 뜻하는 Frequency의 합성어로서, 본작의 트랙들은 ‘다리의 움직임을 나열’한다는 하나의 목적 아래에서 전개되며, 그것은 비주류적인 전자음악으로서 이루어진다. 가령 「Nerve」에서 UN SHAPE가 로봇의 걸음걸이에 착안한 아이디어를 디컨스트럭티드의 문법으로, 「Commuters」에서 Keiiti Aki가 정신 없는 군중의 모습을 키치적인 앰비언트로 풀어냈듯이 말이다. 이 외에도 ttt가 코딩 기반의 시퀀서를 이용하여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방황하는 이를 앰비언트로 표현한 「Wandering」 역시 특기할 만하겠다. 이들의 움직임은 비주류적인 전자음악의 다양한 양태를 담아낸다는 점에서, 본작의 소리와 본작이 기획된 과정 그 어떤 면을 살펴보아도 필연적으로 새롭고 의미있는 일로서 사료될 것이 분명해보인다. 이들에게는 마땅한 보상이 필요하다.

   
   
   

앞서 『Leg-Quency』가 그랬듯, 레이블 VINIOR에서 발매된 『Vol. 002』 역시 컴필레이션 앨범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들이 만들어낸 트랙이 대체로 전형적인 클럽 튠의 전개를 따라간다는 점이다. LOOZBONE의 「Boys In The Club」과 Mar Vista의 「Our House」는 그런 면에서 본작을 대표할 수 있을 하우스 트랙이며, 그 외에도 Will Not Fear의 「Passion Off」 역시 댄스 플로어를 뜨겁게 달굴 수 있는 뱅어 중의 뱅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본작에 Disclosure를 필두로 한 하우스 내지는 클럽 튠을 모태 삼아 공격적인 소리를 자랑하는 트랙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FRNCH BLACK의 「Black Water」는 드럼의 둔탁한 질감과 비교적 가벼운 소리들의 집합이 공존하며 그루브를 자아낸다는 점에서 Kaytranada를 연상시키고, naked Swan.의 「Ophelia」는 Hamlet에 등장하는 한 인물에 관해 파괴적인 소리를 통해 재해석을 수행한 트랙으로서 본작의 그 어떤 트랙과도 결을 달리 가져가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전반적으로 흠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본작에 설득력을 더하기도 한다. 2020년에 생각보다 많은 컴필레이션 앨범이 발매되었지만, 그중에서도 본작이 남긴 표식은 다른 어떤 경우보다 긍정적으로 남을 것 같다. 상당히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2020년 가장 뛰어난 신인 중 한 명이었던 Wona의 데뷔 앨범 『Thanatoid Butterfly』. 본작에 담긴 소리는 꼭 공격적이지만은 않다. 때로는 기괴하고, 음산하며, 듣는 이로 하여금 알 수 없는 긴장감과 공포감을 조성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속성들의 집합 앞에서 덥스텝이니 테크노이니 하는 말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When I Was Dead」에서는 불안정한 파형의 베이스가 Wona 그녀의 읊조림, 차가운 멜로디, 콰이어 신스―이를테면 Mellotron 같은, 이들은 모두 샘플일지도 모른다―와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운다는 점에서 본작을 대표할 만하다. 「Rope Street」의 흉포한 저역대의 소리와 상반되는 노이즈, 비틀어진 파형의 퍼커션이 공존하고, 이따금 급박하다는 인상을 남기는 멜로디와 겹쳐지며 청자의 감상을 한층 높은 곳으로 끌어올린다. 현대 전자음악의 다양한 영역에서 찾아낸 소리를 모아 그녀는 이들이 어떻게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기고 파괴적인 소리로 조직될 수 있는지 탐구했고, 본작의 소리는 모두 그의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본작이 나름대로 Wona 그녀의 자전적인 작품이기도 한 바 문학적으로 서술해본다면, 이들은 죽음이라는 심연 깊은 곳에서 삶에 예속된 이에게 행사하는,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척력―斥力―의 반영과 같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반영에 나는 경외감을 느꼈으며, 본고를 작성하는 지금 다시 한 번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오헬렌&최솔의 『Oh』는 단 다섯 트랙으로만 구성된 EP이지만, 그런 것은 결국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나는 본작의 소리 그 자체가 선사하는 즐거움을 포착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자 했다. 이 말은 그러니까, 내가 본작을 하나의 포크 앨범으로 간주했더라도, 여느 포크 앨범처럼 가사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힘쓸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이야기이도 하다. 애당초 본작은 이상한 작품이었다. 한국인 아티스트의 앨범인데, 가사는 온통 영어인 탓에 한 번 해석해야 하는 수고를 우리에게 안겨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잘 들리지도 않는다. 잘 들리지 않는다기보다는 음절 간의 간격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다. 심지어 그 발음마저도 독특하고 의도적으로 꼬아버린 듯한 느낌도 든다. 다만 그 와중에 퍼커션을 통한 리듬의 구조는 명확하다. 그래서 나는 본작에서의 리듬과 운율에 나의 감상을 맞추었다. 가령 「She died」 같은 트랙을 들어보라. “sun is”를 [썬니스]로, “hotter”를 [할러]에 가깝게 발음하며 목소리 그 자체로도 운율을 조성하려는 시도, 가사를 제외하고서라도 흥겨운 베이스라인과 아프리칸 퍼커션을 듣자면 충분히 음악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것만 같다. 나는 이런 점이 재밌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한 꺼풀만 벗겨내면 또 다른 즐거움을 찾아낼 수 있다는 점이 말이다.

* 본고는 일전에 작성한 글을 발췌하여 수정한 글임을 알립니다.

       
   

나는 태민의 솔로 커리어에서 다뤄진 소리를 들으며 항상 똑같은 사람―The Weeknd―을 떠올리곤 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이것이 피비알앤비―PBR&B―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한 이후 으레 볼 수 있던 광경이라는 이유로 매너리즘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싶지도 않다. 오히려 팝 아티스트의 가치가 자신의 고유한 색채와 레퍼런스 간의 균형을 통해 결정된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태민의 경우는 K-Pop 시장 내에서 처음으로 특정한 색채를 선점한 것에 가깝고, 그것이 자신의 세 번째 정규 앨범에서 괜찮은 완성도의 결과물로서 더욱 높은 설득력을 갖춘 경우로 해석되어야 한다. 가령 2020년 대중음악의 가장 큰 키워드 중 하나였던 “뉴웨이브 디스코 리바이벌”이라는 팻말 아래 「Criminal」은 가장 눈에 띄는 트랙일 것이고, UK 베이스의 색채가 돋보이기도 하는 「Famous」 역시 특기해야 할 지점일 것이다. “다시는 춤을 추지 않겠다.”―『Never Gonna Dance Again : Act 1-The 3rd Album』―라고 말하는 본작의 타이틀이 그렇듯 노래가 한층 돋보이는 지점 역시 존재하는데, 그 예시로 「Strangers」가 있겠고, 「Clockwork」도 적절할 수 있겠다. 본작은 전반적으로 안전주의의 산물이라고 보여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태민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결과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만족스럽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일 것이다.

       
   

많은 이들은 유키카의 『서울여자』를 두고 ‘시티 팝 리바이벌 시대의 제대로 된 시티 팝 앨범’과 같은 수사를 붙이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I FEEL LOVE」는 브라스와 아날로그 신스가 잘 어우러진 팝 트랙이고, 「Yesterday」와 「안아줘」와 같은 트랙은 유키카가 K-Pop 아티스트로서의 잠재력 역시 갖고 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는 지점들이며, 「발걸음」은 듣기 편한 R&B를 지향하는 트랙이다. 물론 우리가 과거 일본에서 유행했던 음악적 트렌드를 ‘시티 팝’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려 본다면 「서울여자」가 그것을 표방한 트랙임은 분명할 테지만, 그것과 결을 달리하는 미드-템포의 잼 「그늘」 같은 트랙도 있다. 그러니까 본작을 ‘시티 팝’이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하려 드는 것은 조금 아쉬울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본작은 특정한 캐릭터를 부여받은 아티스트가 기획된 앨범을 발매한다는 팝 시장 내에서의 오랜 방법론 중 하나를 따라 만들어진 작품으로, 소리는 군더더기 없이 효과적이고, 유키카의 노래 또한 나쁘지 않으며, 캐릭터는 매력적으로 다가오기에 성공적인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 유키카는 이미 본작을 발매한 회사와의 계약을 해지했기 때문에 본작과 같이 컨셉츄얼한 작품이 다시 나올지는 미지수이다. 다만 본작은 앞으로 그녀의 잠재력을 가늠해보는 지표로서 유의미하게 남을 것이고, 그 지표가 기술적으로도 탄탄하니 이만한 경우도 팝 시장 내에서 드물지 않을까 생각한다.

* 본고는 일전에 작성한 글을 발췌하여 수정한 글임을 알립니다.

       
   

만일 당신이 하루 동안의 고된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감상할 앨범을 딱 하나만 고를 수 있다면, 선우정아의 『Serenade』가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겠다. 그녀는 「도망가자」에서 우리에게 힘이 되어줄 것을 자처하며 손을 내밀기도 하고, 「Serenade」를 통해 막연한 만큼 조심스럽게 행운을 빌어주기도 한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들을 향해 대신 욕을 해주기도 하는 「욕의 여행」과 「SHUTHEFXXKUP」은 어쩌면 우리에게 소소할 만족감을 선사해 줄지도 모르겠다. 다만 “Be Yourself”라는 그녀의 외침을 담은 우화들은 본작이 진행되며 마냥 그럴 수만은 없는 모순으로 향하기도 한다. 책임을 짊어진 이들을 바라보는 「수퍼히어로」, 인간관계가 만들어낸 일그러진 자화상을 담아내는 「배신이 기다리고 있다」나 「My Birthday Song」 같은 트랙이 그것이다.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이야기하는 후반부가 그래서 조금은 더 씁쓸하게 다가온다. 사랑을 논하는 「Fall Fall Fall」부터, 굴곡진 삶의 아름다움을 다루는 「생애」를 지나, 자기애를 과시하는 「CLASSIC」에 이르기까지 모두 우리가 간과해왔던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기에 그렇다.

물론 그녀가 한 인터뷰에서 본작에 남을 위해 만든 트랙이 많지 않음을 회고했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내가 나열한 본작에 관한 감상이 그녀의 의도와는 다를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녀의 의도와 정확하게 결을 함께하는 지점이 있다면 아마,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 전하기”가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사전적 정의대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그 자체를 예술로서 정의한다면, 위로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한 편의 따뜻함을 아릅답게 표현해낸 본작에 어떠한 예술적 가치가 존재한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선우정아가 수놓는 저녁의 송가―『Serenade』―는 누구를 향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 사회의 일원으로서 기능하는 모든 이가 될 것이다. 우리가 사회의 일원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자신을 숨김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고된 일과를 뒤로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만큼은 그런 탈을 내려놓아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선우정아는, 우리에게 그래도 좋을 것이라며 본작을 통해 노래한다.

* 본고는 일전에 작성한 글을 발췌하여 수정한 글임을 알립니다.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다. 얼터너티브라는 말로 대표되는, 2010년대 초반 어느 날 급작스럽게 속도가 더해진 시류는 각기 장르에 저마다의 형태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기존의 작법을 뒤흔들었다. 이는 흑인음악의 한 갈래로서 샘플링에 큰 빚을 진 장르이기도 한 힙합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며, 전자음악 작법의 수입이라는 형태로서 수많은 이들에 의해 그 결과물이 제출되었다―물론 이는 가상 악기에 관해 드라마틱하게 높아진 접근성과 이전과는 조금 달라진 샘플링의 정의가 주는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힙합을 자신의 지평으로 삼는 Omega Sapien의 『Garlic』 EP는 그러한 시류의 뒤를 이을 만한 재밌는 작품이다. 이수호, 전광재, 수민, NET GALA 등 다양한 이들의 조력이 깃든 본작에서 우리는 전자음악의 다양한 소리가 힙합이라는 문법 아래에 비교적 엄격하게 편입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가령 UK 베이스를 토대로한 「i p t i m e」나 디컨스트럭티드의 소리가 돋보이는 「WWE」가 대표적일 것이며, 힙합 트랙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이질적인 소리들로 가득한 「Ah! Ego」나 「Happycore」 역시 듣는 이에 따라 흥미로울 수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Omega Sapien이 주장하던 얼터너티브 K-Pop으로의 진취의 예시로서 본작이 적합할지는 상당한 의문을 품고 있다. 물론 일전에도 언급했듯, 그 맥락을 가사―혹은 그것을 독해하는 방식―에서 찾아보려한다면 나름 설득력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결정적으로 본작의 소리가 말 그대로 난장판인 와중에 본작의 중심에 굳건히 자리하는 Omega Sapien이 내가 생각하는 K-Pop 아티스트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내가 생각하는 K-Pop은 좁은 의미에서는 전자음악의 소리를 빌려 비약적으로 성장한, 한국의 문화임을 자처하는 팝의 영역, 넓은 의미에서는 자본이 동원되어 형성된 새로운 캐릭터-음악 장르이다. 다만 내가 확신하는 점은, 본작이 한국힙합 내에서 하나의 이정표로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전자음악과 힙합과의 교차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이 시대에, 본작이 담고 있는 다양한 양태의 소리가 바로 그 이유이다. 랩을 위한, 랩에 어울리는 프로덕션과 힙합을 지평으로 삼는 이들의 진취적 움직임은 과연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겠는가? 이 질문은 힙합에서 통용되어오던 기존의 작법―샘플링―이 한국 내에서 적용되기 아주 쉽지만은 않았다는 점에서 생각 외로 중요할 수 있다. 물론 기존의 그것이 갖는 잠재력도 상당했지만, 그것은 본작의 소리에 관해서 역시 매한가지다. 이렇듯 본작의 완성도가 눈여겨볼만한 무언가이기도 한 이유로, 본작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조지환이 “여러 스타일의 곡들을 정갈하게 정리했다는 점이 훌륭하다”라고 백예린의 『Every letter I sent you.』에 관해 말했듯,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가령 「Rest」와 「Popo (How deep is our love?)」, 「Mr.gloomy」와 같은 트랙들에서는 알앤비와 소울의 향취를 느낄 수 있고, 「0310」과 「Square (2017)」은 얼터너티브 록 트랙으로서 우리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지점일 것이다. 누군가는 그녀의 장난기가 서려있는 「Bunny」를 가장 좋아할 수도 있겠고, 또 다른 누군가는 본작에서 유일하게 한국어로 가사가 쓰여진 「Datoom」을 가장 좋아할 수도 있겠다. 그녀의 우상인 Amy Winehouse를 향한 헌사가 담긴 「Amy」나 「True lover」도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으며, Loopy가 피처링으로 참여한 피비알앤비 트랙 「Point」 역시 듣는 이에 따라 흥미로울 수 있겠다. 피아노와 아날로그 신시사이저, 기타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대체적으로 일관된 분위기를 조성하기를 시도한 구름의 프로덕션과 엔지니어링도 특기할 만 하지만, 결정적으로 어떠한 사운드스케이프를 조성하는 데에 가장 큰 지분을 갖는 이는 마이크 앞에 선 백예린 그녀일 것이다.

그래서 조지환 역시 정갈하다고 말했던 것일 테다. 어떤 트랙에서라도 그녀의 위치가 굳건하고, 소리가 이질적으로 작용하는 트랙도 일절 찾아볼 수 없다. 그런 탓에 무던하다고 느껴질 수 있겠으나, 본작은 온갖 스타일의 작품이 범람하던 2020년 대중음악 속에서 가장 편안하고 따뜻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 중 하나임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만일 『Our Love Is Great(2019)』가 그동안의 그녀와 차별화되는―당시의 그녀는 JYP Ent.와의 계약이 만료되기 직전이었다―얼터너티브 알앤비와 결을 함께 하는 지향점을 개괄적으로 드러내던 것이었다면, 본작은 더욱 풍성하고 완성된 형태로서 자신의 힘을 가감없이 선보이는 장일 것이다. 그런 힘 앞에서 장르적 가치나 기술적인 완성도 등 여러 잣대를 갖다 대는 일은 무용해졌고, 본작에 쓰인 영어 가사나 그것이 가져온 어떤 성과, 혹은 힙스터가 고대하던 팝스타의 발걸음에 관해 논하는 것은 별다른 필요성이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없다고 확신한다. 그녀가 그녀 자신에게 건넸던 말이 긴 시간을 지나 우리 앞을 아름답게 수놓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넘칠만큼 충분할 테니 말이다.

       
   

인디 포크. 오늘날 인디는 예전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고, 이 영역의 수많은 작품들이 장르를 넘어 청자의 취향을 불문하는 경지에 올라섰다. 내가 굳이 그 예시를 들지 않더라도, 특히나 통기타를 위시한 어쿠스틱한 연주를 내세우는 경우에는 하나같이 기시감과 접근성의 가치가 공존하는 양날의 검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들 중 많은 수가 특별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반드시 아티스트의 재주에 빚을 지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정밀아의 『청파소나타』가 철저히 전통적인 포크 작법을 따라가는 인디 포크 앨범이기 때문이다. 물론 3박자로 전개되는 「언니」같은 트랙도 있지만, 대부분 4박자의, 통기타와 피아노를 동반한 어쿠스틱 연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일차적인 이유일 것이다. 또한 그 연주가 정밀아가 건네는 말을 보조하는 역할로서만 기능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작이 전통적인 포크 작법 아래에서 진행된다 볼 수 있을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그러할지라도 특별한 경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앞서 서술한 바 있다. 본작을 그 사실에 대입해보면, 정밀아의 재주 중 하나는 소박하고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서술로 이루어진 가사에서 드러날 것이다. 가령 어머니와 딸이 안부 전화를 나누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서울역에서 출발」이나,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에 관해 사색하는 「어른」, 2020년 발생한 크고 작은 일들을 소회하는 「환란일기」에서의 서술이 대표적이다. 그 소박함은 사회를 향한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하는 「오래된 동네」나 「광장」 역시도 매한가지다. 가사의 가치는 본작의 배경이 메타포로 삽입되는 과정 덕에 배가된다. 청파동이라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에서 1년여를 지낸 그녀는 근사하게 변한 서울역 역사 뒤편에 위치한 굽이진 마을의 일상을 담았고, 「광장」에서는 집회에서의 함성과 함께 하는 도로의 소리를 삽입했다. 한편으로는 타악기가 박자감을 잃은 채 존재하고, 갖은 풍광이 소리로서 넘실거린다. 그녀는 자신의 눈에 비친 세상을 사운드스케이프로서 반영하면서도, 그들이 갖는 역동성과 인격성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본작이 특별한 것이다. 언뜻 보면 자신만의 이야기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 그 사실을 우리 곁으로 곧장 들고와 그 체온을 전달한다는 것. 그것을 가사로서 그리고 소리로서 표현한다는 것. 이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본작이야말로 우리가 인디 포크 앨범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특별한 경험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종교적, 신화적 정의를 소거한 후의 천국 즉, 『헤븐』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이렇다. 어떤 제약도 받지 아니하는 자유롭고 편안한 곳, 또는 그런 상황. 이 정의로서의 천국이라는 단어는 결국 비유적인 표현으로 밖에 기능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제약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천국이라는 단어가 최소한 삶의 영역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혹은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김사월은 본작에서 이러한 천국이 존재할 리 없지만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을 담아 가사를 써내려가고 노래한다. 자신이 「일회용품」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기억과 잠을 「교환」해준다는 대목에서 이유 모를 공감을 우리는 하고 있지는 않은가. 포근하고 달콤한 것들로 꾸며져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노란 불빛을 쫓아가는 「나방」처럼 우리는 파괴적일 현실을 마주하고 있을 테고, 「오늘 밤」에서의 가사처럼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체현되는 것은 예삿일에 가까울 것이다. 「헤븐」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슬플 일도 좋을 일도 없는 곳이 세상이고, 그렇기에 자신마저 굳이 사랑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고 술회한다.

김해원과 함께 했던 『비밀(2014)』도, 『수잔(2015)』도, 『로맨스(2018)』도 그녀의 작사를 거치고 나면 따뜻한 듯 보이면서도 반드시 어느 한구석이 반드시 서늘할 수밖에 없는 단어―혹은 메타포―로 변모했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 그 정도가 본작에서 더욱 심하다. 통기타를 들고 마이크 앞에 서 있을 그녀가 왠지 모르게 조금은 차가워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일 테다. 「일회용품」의 발랄한 도입부도, 「도망자」의 펑키한 연주도, 「내가 사랑할 그 사람은」에서의 친숙할 코드 진행도, 「헤븐」에서의 아기자기한 퍼커션도 그런 이유에서인지 문자 그대로 와닿지 않는 감이 있다. coloringCYAN은 일전에 김사월의 움직임 즉, 연주와 목소리의 가치를 동일하게 가져가는 모습을 두고 한국 포크의 전통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라고 서술했었다. 나는 본작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서술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움직임이 투영된 본작에는 이유 모를 위화감과 이질감을 동반한 채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지만, 아무래도 그것 역시 김사월의 의도와 결을 함께하는 것만 같다. 그것은 지금까지 이야기했듯 『헤븐』이란, 당신이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것과는 달리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 본고는 일전에 작성한 글을 발췌하여 수정한 글임을 알립니다.

       
   

“모든 것이 빛나는 것은 아니지만, 더없이 빛나는 것들은 존재한다.” 다브다의 『But, All The Shining Things Are』는 어딘가 반드시 존재할 빛을 찾아 떠나는 사람의 여행기가 담긴 작품이다. 그들은 말 그대로 눈부신 인트로 「Light Comes Back」에서 이미 빛의 존재를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못박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어둠에서 시작하여 역재생되는 목소리와 정상적으로 재생되는 악기, 강렬한 드럼과 팔세토를 차례대로 마주하는 우리는 그들의 소리에 의해 시간상으로든, 공간상으로든 빛은 어디에나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다만, 조금 생각해보자. 모순적이지 않은가? 나는 이미 앞에서 명암을 다루는 명사와 형용사를 여러 번 사용했다. 하지만 “다시금” 깨닫는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조금 꺼림칙하지만 이것은 사실 금방 해결될 의문이다. 인격적 성장을 그림자의 길이로 표현한 「여름놀이」, 적절하게 삶을 찬미하는 듯 하다가도 그것에 도전하는 화자의 모습을 담은 「Journey」, 인간관계의 괴리를 노래하는 「혼자놀기」. 「꿈의 표정」을 지나 청춘이라는 단어의 이면에 공감하며 우리에게 손을 내미는 「흔들흔들」까지 감상한다면 말이다.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다브다가 본작에서 말하는 빛은 말 그대로의 빛이지만은 않은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빛은 행복일 것이고, 그것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그 자체로 삶이라는 단어로 승화될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살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일이 당연하고 보편적일 것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던 셈이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본작은 끝까지 아름다운 이야기로 가득하다. 밤하늘이기에 빛날 수 있는 별들, 그리고 그 별들이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고 사라지는 순간을 다루는 「별아,」와 「검은밤을 가르던」, 그 자체로 고행길이 되어버린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어떠한 위로를 건네는 「Polydream」과 「무딘」. 「Light Comes Back」에서 그랬듯, 이들은 누군가의 시야에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서 빛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이 어떠한 여행길에 올라선 순례자일 것이기에, 그것이 기만적인 태도는 절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가볍다고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들의 눈부신 연주에 관해서는 내가 보탤 말이 없다. 다만 나는,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어둠 속에서 빛의 방향을 잡지 못한 채 헤매는 모든 이들에게 커다란 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모든 빛나는 것은, 이미 존재하기에 말이다.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20세기 소설가 이상의 단편소설 <날개>의 종결부에서 등장하는 대사에서 영감을 얻은 신해경의 『속꿈, 속꿈』. 본작에서 신해경은 이별을 겪은 인물로 화하여, 가슴 아픈 상황을 외면하고자 꿈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그는 꿈이라는 소재를 더는 만날 수 없는 이전 연인을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공간적 요소로 활용하며 본작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런 그에게 꿈이란, “아무것도 믿을 수 없고, 어떤 말도 바꿀 수 없는” 공허한 영역이지만 동시에 “끝이 없는 기쁨”으로서, 자신이 원하는 이상향을 마주하기 위해 꿈으로서 자신을 속이고, 또 그 속임에 기꺼이 넘어가주는 태도를 보인다. 다만 누구나 예상이 가능하듯, 그가 그런 현실도피를 자행하더라도 결국에 완전히 달아날 수는 없었다. 꿈에서 만난 「그대는 총천연색」이기에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지만, 이것은 결국 꿈으로밖에 남지 못하듯이 말이다. 그런 화자는 절규하며 「독백」한다. “매일 밤 슬픔 속에 숨져가는 나를 찾아와줘요.” 그에게 꿈은 “끝이 없는 기쁨”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슬픔 속에 숨져간다고 술회하는 것은 그 역시도 꿈이 아닌 현실로 돌아가야만 하는 시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꿈에서 한 송이의 「크로커스」가 되어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꿈을 떠난다.

드림 팝으로도, 슈게이징으로도 보일 수 있는 본작의 연주는 꽤 괜찮은 완성도를 보인다. 꿈이 그렇듯 꿈이 그렇듯 일관적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위해 리버브가 짙게 걸린 소리가 「회상」과 「그 후」에서는 우리의 주의를 끄는 흡인력 높은 요소로 작용하고, 「꽃 피는 계절처럼」에서는 마지막 트랙으로서 우리에게 깊은 잔향을 남기는 아주 중요한 성분으로 작용한다. 동시에 몽환적이면서도 멜로디컬한 색채를 잊지 않았다. 그 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다름 아닌 「어떤날」과 「그대는 총천연색」으로서, 탄탄한 빌드업과 함께 능숙하게 상승과 하강을 조율하는 모습이 신해경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겹쳐지는 지점을 마주할 때 근사하다는 말을 꺼내지 않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드림 팝과 슈게이징이 각자의 영역에서 자가 복제라는 부정적인 프레임 앞에 가로막혀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본작은 나름대로 그러한 프레임을 파훼하기 위한 자신감 넘치는 시도일 것이고, 문학과 음악이라는 이질적인 두 영역을 적절하게 영합해낸 신해경은 뛰어난 연출가이자 작사가, 그리고 동시에 연주자로서 인식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본작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작품으로 나의 기억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2020년이 지나간 현시점에서, 대한민국에서 이날치를 모르는 이는, 과장을 조금 보태보자면 상당히 적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 모를 수도 있다고? 그래도 최소한 「범 내려온다」를 들어본 적은 있을 테다. 뭍으로 올라온 별주부가 잘못 부른 호 선생이 신이 나서 그들 앞에 다가오는 대목을 중독적인 챈트와 매력적인 하모니로 담아낸 흥겨운 펑크 트랙 「범 내려온다」 말이다. 다만 장영규의 안목에서 출발한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와의 협업이 만들어낸 일련의 거대한 반응에 관해서는 이미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입을 모아 극찬한 바 있으니 적당히 넘어가도록 하자. 그럼에도 나는 그들이 판소리 <수궁가> 속 11개의 대목을 골라 흥겹고 신명 나는 트랙들로 개편하여 제작한 『수궁가』 그 자체에 관해서는 더 많은 이야기가 오고갈 필요성이 있다고 느낀다. 본작에서 강한 인상을 남기는 트랙은 단 한 트랙에 그치지 않는다. 수궁으로 잡혀온 토끼를 보고 달려드는 수졸들과 그에 맞서 항변하는 토끼의 모습을 랩에 가까운 보컬이 앞다투어 경쟁하는 흐름이 흥미로운 「좌우나졸」과 사이키델릭한 터치가 돋보이는 「어류도감」과 같은 트랙도 그에 뒤지지 않는 존재감을 내뿜는다. 조금 느린 템포의 「약성가」와 「말을 허라니, 허오리다」에서도 그들의 기조가 퇴색되지 않고 고유의 창법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흥미롭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외에도 내가 특기하고 싶은 지점이 또 있다면 「별주부가 울며 여짜오되」와 「약일레라」가 있겠다. 토끼를 놓아주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읍소하는 별주부의 모습이 담긴 전자의 경우 각기 다른 감정을 묘사하는 가사와 억양을 통해―우리가 그 내용을 익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우리의 트랙에 관한 몰입도를 상당히 높인다. 후자의 경우 펑크, 디스코, 신스 팝을 한데 모아 흥겨운 후렴구와 리듬을 선보이는 트랙으로서 그들이 본작에서 들여준 소리들이 집약체처럼 모여있다는 점에서 강렬한 아웃트로가 될 수 있다. 이렇듯 본작에는 권송희, 신유진, 안이호, 이나래의 4명의 소리꾼이 독창과 화성을 자유롭게 오가는 모습, 장영규와 정중엽의 흥겨운 베이스 그리고 이철희의 적당한 드럼의 연주가 모인 상당한 완성도의 트랙들이 모여 있다. 본작은 마당보다 댄스 플로어가 익숙할 우리 세대에게 판소리의 매력을 어필하는 작품이기도 할 테지만, 무엇보다 국악의 딜레마와 아티스트로서의 현실적인 고민 사이에서 영민하게 움직이는 젊은 국악인들의 표상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끝맺음을 위해 다시 한 번 인용하자면, 이날치와 본작은, 현대 국악의 앞에 있는 길이 얼마나 다양한지, 그리고 우리가 어떠한 방식으로 국악을 사유할 수 있을지 놀라운 방법을 통해 체현한 사례로서 기억되어야만 할 것이다.

       
   

조지환의 말대로, 앰비언트는 그저 조용한 음악들을 묶어놓기 위해 마련된 팻말은 아닐 것이지만, 어쩌면 그런 이유에서 출발했을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앰비언트―Ambient―라는 형용사의 사전적 정의 덕분에 꽤 명확할지도 모른다. 앰비언트의 선구자 격 인물인 Brian Eno는 “흥미로운 만큼 무시될 수도 있어야 한다.”라는 말을 자신의 앨범인 『Ambient 1 : Music For Airports(1978)』의 라이너 노트에 남겨놓았고, 그 앨범에서 들려주던 단출한 선율과 낮은 볼륨, 소리가 갖는 긴 호흡과 같은 요소들은 오랜 기간 앰비언트의 주된 철칙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조지환이 그랬듯 나 역시 현대에 와서 앰비언트라는 단어가 조금은 넓은 의미로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자 하는데, Pitchfork에서 2016년에 기고한 앰비언트를 소개하는 글에서의 문장과 맥락을 함께하기에 옮겨본다―이제 “앰비언트”는 춤추기 위한 음악에서부터 거친 소음을 다루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음악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이 말은 곧, 현재 앰비언트라고 규정되는 영역 내에서 Brian Eno가 주장했던 “흥미로운 만큼 무시될 수도 있는” 소리를 여전히 다루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외에도 “흥미롭기에 무시될 수 없는” 소리, 혹은 그러한 스펙트럼의 중간 어딘가의 소리 역시 다뤄지고 있다는 말로 변환될 수 있다. 그래서 생각보다 넓고 느슨한 정의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가령 Aphex Twin의 디스코그래피는 앰비언트의 정의가 변화하던 과정을 보여주는 적실한 증거가 될 것이며, Oneohtrix Point Never의 경우는 극단적이지만 그렇기에 현재의 앰비언트를 논함에 있어 대표적으로 다뤄지는 이름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 보니 Brian Eno의 방법론을 최대한 이어가려는 이들도 조금은 다른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 듯하다. 본명을 쓰는 Nicolas Jaar나 Grouper, Tim Hecker와 같은 이들이 그런 부류일 텐데, 그들은 대개 자신의 소리가 조용함과 시끄러움,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기를 지향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소리는 볼륨, 질감, 인상 그 어떠한 척도를 갖다 대더라도 그 정도가 심히 모호한 탓에, 흥미로운 만큼 무시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흥미롭기에 무시될 수 없을지도 모르는 다소 혼종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하는데, 그런 소리가 호흡마저 길고 음고의 변화가 아주 크지 않음과 동시에, 우리가 있는 공간을 가득 메우는 무언가이기도 한 이유로 때로는 기괴하고 소름 끼치며 무서운 소리로 전환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서론은 이쯤 해두고, 나는 Song youngnam(이하 송영남)의 본작 『Worldless』가 그러한 소리를 담은 앰비언트 작품이라고 이해한다. 「In and Out」과 「Near and Far」에서의 협화음과 불협화음을 자유롭게 오가는 형태로 구성된 드론부터가 본작에서 앞으로 들릴 소리의 전형을 시사하는 것과도 같다―그것은 낮은 볼륨과 단출한 구성 등 모종의 이유로 인해 무시될 수 있는 것처럼 들리다가도, 우리의 역치를 건드리는 순간 불편함과 음산함 등의 감상으로 나아가며 무시될 수 없는 것이 되는, 심히 이상한 소리이다. 「We Prefer Group A」와 「Repetition of Pattern」에서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같은 소리―가령 첼로의 Portamento 연주라던지―가 반복적으로 연주되며 우리의 감상이 나아가는 방향을 시간에 따라 짚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소리가 우리의 공간을 가득 메우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된다.

본작의 소리가 다들 비슷하다고 여겨질 수 있겠다. 트랙 간의 통일성이 소위 동어반복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인데, 하지만 송영남은 우리가 어떠한 트랙에서라도 비슷한 감상을 가져가기를 종용하는 것처럼 보인다(그럴 수 있는 이유는 후술한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Multiples of A」를 본작의 하이라이트로 꼽는다. 음고와 질감이 다른 두 줄의 기묘한 드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피아노 소리가 긴 호흡을 가져가며 알 수 없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긴장감이 한껏 고조될 즈음 그것이 풀어지나 싶지만, 그 자체로 무시될 수 없는 소리로 기능하는 기이한 선율의 피아노 소리가 들리며 트랙이 마무리된다. 단 세 개의 소리를 통해 초기 앰비언트의 작법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자신이 지향하는 “무시될 수 없는” 소리로 조직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소름 끼치고 불편한 경험이 될 수 있는지 가장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트랙이라고 나는 여긴다.

나는 초기에, 나의 감상을 송영남이 제시한 제작 의도와 결부 짓기를 시도했다. 송영남이 제시한 것은 개인 간의 다름을 판가름하는 지표인 틈을 다루는 인간 사회의 자화상이었다. 그 안에서는 사회의 범위가 너무나 큰 나머지 그 틈이라는 개념은 간과된 모양이었고, 틈 너머에 있는 이를 자처하는 송영남은 “Group A”에 속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시도를 본작에 담아내고자 했다고 나는 독해했다. 생각해보라. 우리의 사회가 틈이 존재함을 무시하는, 개인의 보호와 다름의 지표가 없는 공동체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삭막할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송영남은, 본작에서의 소리가 하나같이 불편하게 들리기를 우리에게 요구한 것일 테고, 그래서 나는 더 이상의 추상적인 독해를 포기했으며, 본작의 소리가 무시될 수 없는 두려움을 얼마나 내포하고 있는지에 집중하게 되었다. 누군가 나에게 한국에도 뛰어난 앰비언트를 보여주는 아티스트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자신있게 본작을 예시로 들며 송영남의 이름을 언급할 것이다. 정말 인상적인 작품이다.

* 본고는 일전에 작성한 글을 발췌하여 수정한 글임을 알립니다.

       
   

Album Of The Year! 추다혜차지스의 『오늘밤 당산나무 아래서』는 내가 생각하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2020년 최고의 작품이고 성과이다. 나는 본작을 두고 어떠한 이해관계나 현상에 관해 논할 생각이 전혀 없다. 내가 본작을 으뜸으로 꼽았듯, 본작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놀라운 순간으로 가득하고, 오히려 그것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령 첫 트랙 「undo」에서의 “여봐라”라고 외치는 추다혜의 모습 뒤로 강렬한 록의 연주가 진행되는 순간부터 그렇다. 추다혜의 목소리에는 영험함이 아로새겨져 있고, 차지스의 연주에는 예측을 불허하는 놀라움이 담겨있었다. 이미 본작의 첫 순간부터 내가 당산나무 아래로 끌려가는 것은 불가항력의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잠깐, 당산나무가 무엇인가. 당산나무는 마을의 수호령이 깃들었다 여겨지는 수호수―守戶樹―로서 신격화되는 나무임과 동시에 굿판이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undo」에서의 영험함과 놀라움을 따라 굿판으로 향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부터 특별한 대목인 것이다. 지금껏 국악과 양악의 조화를 선보인 이들이 무속 음악 즉, 무가―巫歌―를 빌리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무가를 빌려 근래 국악 크로스오버를 지향하는 이들의 시도와는 다른 것을 우리에게 선보이려 한다. 무당 방울의 소리, 기타의 사이키델릭한 연주가 돋보이는 「비나수+」에서 그들은 현장성이라는 무가의 특성을 “서울하고도 특별시라 서대문구 연희동 로그스튜디오로,” “하연다년 경자년―2020년―이옵고 달에나 월색은 3월달요,”라는 말로서 구현하여, 자신들의 음악이 본작에 잘 녹아날 수 있도록 소원하는 동시에 “부귀공명 열어주구 아리질병 근심우환걱정 다 시기눌제”라는 말로서 그들이 굿을 하는 대상이 우리 모두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궁아궁아 대천궁아”로 시작되는 추다혜의 서도 창법에서 기원한 목소리는 그 자체로 대단한 힘을 지니며, 「오늘날에야」에서의 “굿패키지로 정성 올려”하는 모습과 함께 평안도 굿을 그야말로 제대로 체현하는 모습을 보인다.

“피안도 서낭굿으로 신맞이를 하고, 제주도 영등굿으로 부정을 씻어, 황해도 재수굿으로 명과 복을 빌고”라는 「비나수+」의 가사, 그리고 “부정이 많다 부정을 씻자 새도림으로 부정을 씻자”라는 「오늘날에야」의 가사에서 드러나듯, 「사는새」부터는 제주도의 굿에서 기원한 선율을 들려준다. 쫓아내야 할 새들의 이름을 읊으며 3박자의 재즈 연주로 빌드업을 쌓다가 점진적으로 펑크―Funk―록의 색채가 더해지더니, “주어라 훨쭉 훨쭉 훨짱”이라는 추다혜의 마지막 외침을 뒤로 김오키의 근사한 색소폰 연주가 합세하며 감흥을 더한다. 우리의 감상이 한껏 높아졌을 때 그들은 「unravel」을 통해 능숙한 완급조절을 보여주고, 본작의 하이라이트인 「리츄얼댄스」로 향한다. 흥겨운 펑크 리듬을 바탕으로 서우젯소리에서 기원한 특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우리는 그들과 하나가 되어 신명 나게 춤을 추게 된다. “요왕 놀면 선왕도 놀고 선왕님 놀며는 여러분도 논다”라고 말하듯 그들은 우리가 모두 한데 모여 춤을 추며 즐기기를 권하는 것이다.

신도 모셨고, 부정도 씻은 그들은 우리 모두와 함께 명복을 빌기 위해 신나게 춤을 추며 황해도로 향한다. 레게 연주와 자그마한 전자음이 겹쳐있는 스네어가 우리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에허리쑹거야」의 감상도 특별할 것이지만, 나는 「차지S차지」에 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거의 모든 가사가 창작된 것으로 이루어진 「차지S차지」의 전반부는 5-5-6-5박자라는 특이한 구조로 진행되는데, “다 지나가요 다 지나가요 힘듦 설움 아픔도 다 지나가요”라는 가사는 COVID-19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물론 그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본의 아니게 본작 내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게 된 셈이다. 4박자의 레게 연주로 변주가 진행된 후에 그녀는 명복이 우리 “모두의 차지”일 것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본작의 핵심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명확하게 가리킨다. “무가에는 누군가를 위한 ‘치유’의 의미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음악이 개개인의 마음을 터치할 수 있고 그것이 즐거움과 안정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이 예술로서 무가의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추다혜는 말한다.

「에허리쑹거야」의 리믹스 트랙 격인 「복Dub」을 마지막으로 하나의 멋들어진 굿판-순회공연은 막을 내린다. 나는, 그리고 본작을 감상한 우리는 어쩌면 그동안 있지 않았던 작품을 감상한 것일지도 모른다. 재즈, 사이키델릭, 펑크, 록, 레게 등의 요소가 무가가 지닌 정서, 분위기와 함께 호흡하는, 그리고 추다혜의 목소리가 작품의 완성도를 보증하는 신기한 광경을 우리는 목도하고야 말았다. 추다혜차지스가 본작의 소리를 “펑쿳―펑크+굿”이라고 자칭했듯이, 다른 누군가는 또 다른 장르 이름을 생각해 내어 가장 윗부분에 그들의 이름을 올리기를 시도하겠지만, 사실 본작이 주는 대단한 감흥과 잔향 앞에서 그런 일은 필요성이 흐릿해진다. 서두에서도 이야기했듯 본작은 그저, 놀랍고 화려하며, 흥겨움과 동시에 가슴 뛰는 순간들로 그득할 뿐이고, 그런 순간들을 포착하는 것이 본작을 감상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일 것이다. 더는 내가 첨언할 것이 없다. 무언가 말을 붙이는 것이 민망하기까지 할 정도이다. 본작, 추다혜차지스의 『오늘밤 당산나무 아래서』는 단순히 2020년 한 해를 빛낸 작품일 뿐 아니라, 앞으로 꽤 긴 시간 빛을 발할 별 중의 별일 것이라고, 강하게는 그래야만 한다고 이 자리에서 아주 과감하게 주장해보려고 한다.

* 본고는 일전에 작성한 글을 발췌하여 수정한 글임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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