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here
Home > Ji Hwan > Reviews > 장희진, 『Dream Signal』

장희진, 『Dream Signal』

ㄱ.

『Dream Signal』은 시끄러운 음악이다. 마치 무언가 무겁고 거칠고 단단한 것을 마구 갈아대고 지져대고 짓이겨대고 뜯어대고 부숴대는 양 노이즈들이 이어지다 끊어지고 되풀이된다. 일곱 곡은 너무 짧을 수도 있다. 모종의 박진감 속에서 순식간에 지나가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쩌면 견디기 힘들 만큼 길수도 있다.

시끄럽다는 것이 꼭 소리가 너무 크다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실 재생 시 볼륨이나 엔지니어링의 차이에 따라 더 조용한 음악도 더 크게 들릴 수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시끄러운 소리들에 고유한 특질들을 기술하는 방법을 찾고 싶다. 가령, 시끄럽게; 과도한 강도와 긴장. 폭력, 공포. 저 시끄러운 노이즈도 무언가를 모사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선로와 승강장. 제철공정. 공사(「수혈」). “우리가 어둠에게 삼켜지는 동안 / 도처에서 공사는 계속되었고 / 수리가 계속되었고 / 음악이 계속되었다”1 그 주위에서 항상 통째로 공사 중인 도시들.2 “음악을 듣고 그리고 도착하는 곳은 […] 공사 중의 세계.” “우리는 어둠에 묻혔고 덜컹덜컹 소리에 완전히 가려졌다.”3 그러나 반대로 너무 시끄러운 노이즈는 아무것도 모사할 수 없을는지 모른다. 아마도 노이즈 속에서는 종종 소리들의 정체를 식별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노이즈가 재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도 지시할 수도 없는 까닭에. 아니면 아마도 노이즈는 긴장과 폭력의 모사나 상징 등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직접적인 긴장과 폭력으로서만 쇄도하며 표현될 수 있는 까닭에. 달리 적자면, 나는 노이즈에 의해 매개되어 긴장과 폭력에 가닿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공포와 폭력을 직접 노이즈로서 듣게 되는 것인 까닭에. 요컨대 노이즈는 긴장과 공포에로 접근하기 위해 경유해야 할 중간항이 아니라, 긴장과 공포 그 자체인 까닭에.

갈수록 더 시끄럽게. 시끄럽다 못해 소리가 구겨질 때까지 더 시끄럽게. 끔찍하게. 이윽고 『Dream Signal』은 끔찍한 음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시끄러운 음악들은 언제 파괴적이게 될까? 그리고 또 언제 파괴적이기를 그칠까? 파괴적이라면 무엇에 대해 파괴적일까?

한 가지 가능한 대답은 소리들을 제어하려는 의도나 규칙들에 대해 파괴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끄러운 음악들은 제어되지 않을 때 (제어에 저항할 때) 파괴적이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시끄러운 소리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끌어 모아 만든 결합체가 시끄러운 음악들이라고 한다면, 시끄러운 음악들은 항상 어느 정도든 스스로의 파괴적인 성격을 포기한 채로 태어날 수밖에 없는 셈인데, 왜냐하면 소리들을 끌어 모았다는 것은 이미 그 소리들을 제어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어 없는 결합은 상상하기도 이해하기도 힘들다. (제어는 물론 단지 평균율이나 기보법 같은 것들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제어의 엄격함을 최소화하는 방법들은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겠다. 이를테면 즉흥음악은 가장 느슨하게 제어된 음악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소리들을 전혀 제어하지 않고 음악을 만든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즉흥연주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즉흥연주에 임한다는 것은, 뜻한 적 없는 소리가 원하는 만큼 제멋대로 튀어나오기를 기대한다는 것이고, 연주 중 자신의 통제가 실패하게 되기를 계획한다는 것이다. 기대와 계획은 이미 제어일 수 있다. 즉흥연주는 실패까지 자신의 제어의 범위 안으로 집어넣는 기획이다. 즉흥연주가 제어되지 않은 소리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유도하거나 만들어내려는 시도라면, 그것은 어쩌면 제어되지 않는 소리들까지 계획하고 기대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총체적인 제어방식일지도 모른다.

연주로 만들어낸 노이즈를 녹음한다면 사정은 더욱 복잡해진다. 이를테면 게인 노브를 돌려 노이즈를 만들어내는 연주자가, 매번 똑같은 노이즈를 만든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신중하게 노브를 돌려도 사람 손으로 매번 똑같은 게인 값을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노브가 돌아가는 정도가 매번 달라지는 만큼, 노이즈의 음색이 조금씩 연주자의 제어를 비껴갈 것이다. 레코드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녹음 장치에 저장된 소리들을,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항상 동일하게 재생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레코드는 태어난다. 노이즈를 녹음한다는 것은, 노이즈가 항상 동일하게 재생될 수 있도록 그것의 음색이며 길이 같은 것들을 고정시켜둔다는 것이다. 저장과 재생은 가장 철저한 제어다. 그러니 녹음은 이미 대단히 엄격한 제어인 셈이다. 녹음된 노이즈는 제어된 반복 속에서 청자를 향한다. 청자는 매번 동일한 노이즈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노이즈 레코드를 재생할 수 있다. 곧, 준비된 마음가짐으로 노이즈를 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4

더구나, 어떤 소리가 어떤 제어를 어떻게 벗어났는가 하는 정보는, 청자에게는 원칙적으로 불분명하며 간접적인 것으로 남는 듯 보인다. 즉흥 연주에서든 아니든, 혹여 연주자의 실수로 인해 연주가 어긋나더라도 그것을 청자가 알아채기란 쉽지 않다. 연주자가 자기 계획을 꼼꼼하게 정리해 청자에게 알려주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연주자가 어떻게 소리들을 제어할 셈인지를 청자가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그리고 연주를 제어하려는 계획의 세부를 모른다면, 제어의 실패를 눈치 채기도 어렵다. 레코드로 들을 때 이 문제는 심각해진다. 레코드를 통해서는 어떤 소리가 어떤 제어를 벗어났는지를 더욱 알기 힘들 텐데, 왜냐하면 레코드가 들려주겠노라고 약속한 것은, 제어의 시도와 그것의 실패가 아니라, 이미 시도된 제어와 이미 완료된 실패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5 일단 녹음된 것은 더 이상 현행적인 제어도 아니고 현행적인 실패도 아니다.

그리하여 레코드는 노이즈에 더 빠르게, 그리고 더 쉽게 익숙해지도록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아무리 시끄러운 소리라도 연거푸 비슷한 걸 들으면 익숙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어나 제어의 실패라는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익숙해진 노이즈가 충분히 파괴적일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면, 노이즈 레코드들은 언제나 이미 다소간 덜 파괴적일 수밖에 없을까?6

『Dream Signal』은 2020년 8월 7일 닻올림 연주회에서 녹음되었다고 한다. 딩앤덴츠는 이 앨범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드림 시그널은 2020년 8월 7일 닻올림에서 열린 라이브 공연 중 7개의 발췌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곱개의 트랙은 무의식에 새겨진 도시의 풍경을 그려내는 전자 소음들의 구름을 제시한다. 필드 레코딩의 증폭과 반복은 청중들이 앉아있는 곳을 지우고, 현실을 닮았지만 어쩐지 기괴한 꿈의 입구로 그들을 안내한다.

ㄴ.

「Brinvilliers’ Throat」의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은 단속적으로 반복되는 소리들이다. 때로는 조금 더 복잡한 리듬으로 들리기도 하고, 음고가 변하기도 하고, 템포를 달리하기도 하며, 잠시 휴지기를 가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반복은 규칙적이다. 곡은 세 부분으로, 곧 도입부, 구간별로 균일한 패턴들을 갖는 반복, 그리고 곡 말미의 혼란스러운 국면으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국면에서도 저역대의 증감이 모종의 규칙성을 띄며 되풀이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긴 반복과 그 반복의 불길한 전조, 이렇게 둘로 나뉠 수도 있겠다. 「Brinvilliers’ Throat」는 위에서 썼던 그 긁어대는 듯한 답답한 노이즈를 짧게 노이즈를 들려주다, “목구멍이 점차 ….”라며 말끝을 흐르는 내레이션으로 이어진다. 내레이션은 역재생되며 기분 나쁘게 계속되고, 그 사이로 다소 높은 소리와 무거운 킥이 겹쳐진 채 반복되기 시작한다. 그 단속적 반복이 커져가기 시작하면 내레이션은 서서히 멎어들 것이다. 그 때부터 그 반복은 빨라졌다 다시 느려지고는 하면서, 복잡해졌다 다시 단순해지고는 하면서, 그리고 몇 번인가 음색을 바꿔가면서 이 곡의 가운데로 들어온다. 간단히 떠올려볼 수 있는 은유로는 심전도 같은 것들이 있겠다. 다만 위태로운 파형을 기록하는 심전도여야 한다. 고동pulse은 어떤 구간에서는 난삽하며 이따금 매섭다. 그것은 들을수록 소름끼치는 고동이다. 그리고 이 곡에서 듣게 되는 것은 단지 그 고동만이 아니다. 온갖 주변 소음들이 그 고동을 에운다. 이 곡의 고동은, 신경 긁어대는 드론 소음들이 덕지덕지 들러붙은, 불순한 반복이다. 그리곤 이내 그 주변 소리 중 가장 무거운 것이 그 고동을 대체하고, 조금 더 불규칙하되 더 두껍고 거칠며 끊어지지 않는 새로운 반복으로 곡을 마무리 짓는다. 

소리들의 되풀이는 종종 소름끼치는 일이 된다. 버크가 작성한 무서운 소리들의 목록에도7 반복되는 소리들이 올라가 있다. 짧게라도 일정하게 반복되는 소리들, 예컨대 고요한 밤 적막한 실내에서 울리는 시계 바늘 소리들은 공포를 수반할 수 있다. 이 때의 공포는 모종의 꺼림칙함이나 경멸감을 계기로 하여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인데, 이를테면 대단히 역한 냄새나 쓴 맛, 또는 기이하게 균형 잡힌 추함 같은 것들이 그 계기가 될 수도 있다.8 불순한 반복이라는 말로 내가 지시하려는 것은, 균형감과 추함으로 공포에 근접해가려는 소리들이다. 그것은 구간마다의 규칙성과 균일함을 갖고 반복되겠으나, 그런 와중에도 난삽하고 지저분하며 더러는 소름끼치는, 예컨대 악취 마냥 진동하는 소리들이다. 「Colors; I’m here!」를 특징짓는 것이 바로 그러한 불순한 반복이다. 알아듣기 힘들게 변조시킨 샘플은, 대체로 낮게 중얼거리며 빠르게 끊어진다. 그것이 산만하게 되풀이되는 동안, 그와 함께 길게 이어지며 각각의 구간을 채우는 긴 드론 노이즈가 함께 울린다. 때때로는 더 높은 음조의 샘플이 역시 짧게 울리다 끊어지기를 빠르게 반복하며 곡을 정신없게 만든다. 「Colors; I’m here!」는 시작부터 기분 나쁜 곡이다. 반복되는 소리들의 음색이나 길이 등은 각 구간들 안에서는 일률적이며, 곡 전체를 통틀어서도 예측할 수 없는 변화는 나타나지 않으므로, 이 곡은 충분한 규칙성을 가지고 있는 곡이다. 그럼에도 이 곡이 차분히 정렬되었다는 인상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 곡은 무척 지저분하게 들린다. 지저분하다는 것을 다른 낱말들로 설명하기 어렵다. 탁한 색의 작은 얼룩들을, 마찬가지로 탁한 색의 벽지 위에 빼곡하게 채워 넣는다면 적절한 시각적 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설사 나름대로는 가지런히 놓였다 해도 지저분하게 느껴져서 현기증이 날 것 같은, 그런 불순한 반복.

그러나 음악이 아무리 지저분하고 짜증나더라도, 그것이 정말 현기증을 일으키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공포라면 더더욱 그렇다. 버크가 이해하는 공포는 가벼운 것이 아니다. 버크는 공포가 분별하고 추론하는 능력의 활동을 정지시킨다고 적는다.9 이렇게 이해할 때 공포는 드문 감정이다. 그리고 어떤 음악이든 그런 드문 감정을 쉬이 가져오지는 않는다.

듣기에 따라 「Colors; I’m here!」는 견딜 만한 음악일 수 있다. 이 곡은 이 앨범의 다섯 번째 곡이다. (그럴 필요야 전혀 없지만) 만약 앨범을 순서대로 재생했다면, 이만큼 기분 나쁜 소리를 이미 네 곡이 지나갈 동안 견디고 난 다음 이 곡에 도착했을 것이다. 약 17분, 귀가 노이즈에 익숙해지기에 충분한 시간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곡 스스로가, 설사 불순한 것이라 하더라도, 반복으로 특징지어지는 곡이다. 곡의 뒷부분을 듣고 있다면, 그때 나는 이미 그 소리들과 비슷한 소리들을 몇 분간이고 들어본 상태일 것이다. 이때, 그 소리들에 대해, 나는 공포에까지 닿을 수 있는 짜증을 느낄 수 있을까? 현기증이 오고, 사고가 멈출 그 지경에까지 닿을 수 있을까? 이미 들어본 소리에서 드문 감정이 몰려올 수 있을까?

관건은 그 모든 되풀이를 듣고 나서도 여전히 시끄러운 소리들에 대한 경계를 유지하는 청취의 예민함일 수도 있다. 또는 그 스스로의 시끄러움을 유지하려는 노이즈의 집중력일 수도 있다.

이 중 후자의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하나의 해답이, 「Climate Setting」과 「Sweet Ramp」를 건너 「수혈」에 이르는 흐름을 통해 주어질 수 있겠다.

「Climate Setting」을 세 가지 층의 주기들로 이루어진 곡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우선 하나의 긴 주기가 있다. 「Climate Setting」에는 더 작고 잠잠한 소리들에서 점차 더 크고 복잡하며 기분 나쁜 소리들에로 향해가는 경향이 있다. 이 경향을 따라, 한 번 작아진 소리들이라도 다시 크고 복잡하게 되기를 되풀이한다. 이것은 이 곡의 시작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흐름이다. 곡이 시작하는 부분과 끝나는 부분을 비교해보면 이 경향은 분명해진다. 시작할 때 이 곡은 낮고 작게 우글거리지만, 끝에 가서는 높고 날카로운 소리들의 반복을 쏟아낸다. 이 긴 주기 아래층에, 더 빠르게 지나가는 더 짧은 주기들이 있다. 이 더 짧은 주기들을 (다소 거칠게나마) 다섯 개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곡의 시작하고부터 1분 20초 쯤 어귀까지, 두 번째는 다시 거기부터 2분 쯤 어귀까지, 세 번째는 3분 어귀까지, 네 번째는 3분 30초 어귀까지, 마지막 다섯 번째는 3분 30초부터 곡의 끝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각각의 주기들은 작은 소리가 크고 거칠어지는 반복의 주기들이다. 이를테면 소리들은 이 곡이 시작할 때부터 점점 커지기 시작해 1분 20초 부근에서 전 첫 번째 변곡점을 맞고, 다시 급하게 작아져서는 2분을 넘어갈 때 다시 급작스럽게 커지는 식이다. 그리고 이 다섯 개의 주기들 아래층으로, 가장 빠르게 지나가는, 아주 짧은 주기들이 나있다. 그것은 그 위의 두 번째 층의 주기들의 진행을 순간순간 변하게 하거나 심지어는 방해하는 일시적인 주기들이다. 그리고 그 가장 짧은 주기들 중 가장 눈에 띄는 변화를 몰고 오는 것은, 두 번째 층의 두 번째 주기 가운데 있는 중단이다. 그 중단은 1분 40초쯤부터 1분 58초 사이에서 느껴진다. 점점 강해져가는 저음역의 노이즈는 이내 모든 소리들을 잡아먹어 버리고, 곡의 진행을 제 자리에 묶어놓듯이 짧은 정적을 가져온다. 달려가던 노이즈들은 무겁게 눌려 잠시 느리게 버둥대다가, 어느 순간 해방되는 것처럼, 마치 터져 나오는 것처럼 속력을 내며 다시 커진다. 이 짧은 국면 안에서 내게 더 시끄럽게 들리는 것은, 해방되며 터져 나오는 순간이 아니라 곡이 잠시 멎는 듯 들리는 순간이다. 그것은 두 번째 층의 두 번째 주기를 한 순간 멈추게 할 뿐 아니라, 곡 전체에 걸쳐 흘러가는 첫 번째 층의 가장 긴 주기의 일관성마저도 방해한다. 점점 커져가던 노이즈들이 너무 강해진 스스로의 세기에 잡아먹혀 멎었을 때, 소리의 크기를 점차 커져가게끔 한다는 그 반복적 운동성이 제 발에 걸려 넘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20초를 넘기지 않는 이 짧은 순간 동안, 청취는 답답해진다. 정지는 갑작스럽게 다가와 마음을 졸이게 만든다. 나는 이 정지 상태 다음에 무엇이 올지 숨을 죽이고 기다리게 된다. 이 순간의 숨 막히는 답답함이 바로 이 곡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격렬한 긴장인 셈이다.

이와 같은 중단, 또는 방해는 첫 곡에서 끝나지 않는다. 바로 다음 곡에서도 소음들의 진행은 중간에 (스스로의) 방해를 받는다. 「Sweet Ramp」에서는 재생시간이 2분 10초가 되기 직전 한 번, 그리고 2분 45초가 되기 직전 또 한 번 그 불연속성이 찾아온다. (이번에도 소리들은 저음역에 잡아먹힌다. 그리고 이번에도 방해 뒤에는 더 큰 노이즈가 터져 나온다. 두껍게 가로막던 벽을 찢고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열차. 이번에도 더 시끄럽게 들리는 것은 열차의 경적이 아니라 선로를 틀어막는 저역의 벽이다.) 그리고 「수혈」에서도, (1분 조금 뒤부터) 출력기기가 긁혀 찢어지듯 소리들이 잦아들며 불연속성이 찾아든다. 가장 지저분한 노이즈가 답답하게 귀를 긁는다.

어떻게 소리들이 더 작아지고 적어지는 것 같은 그 때에 더 시끄러워질 수 있을까? 그것은 그때 소리들이 스스로의 과잉을 가장 난폭하게 드러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혈」의 두 번째 단절과 비교해 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두 번째는 첫 번째와는 다른 식으로 찾아온다. 두 번째는 2분 5초에 온다. 그 때에는 겹쳐져 있던 소리들의 가장 굵은 줄기가 갑자기 멎게 될 것이다. 그 순간에 곡은 가장 큰 소리를 거두어가는 듯 들리고, 소리들은 그에 순응하여 급히 사라지는 듯 들린다. 그러나 첫 번째의 단절에서는 소리들이 스스로의 광포함에 눌려서 (혹은 출력 기기가 미처 그 소리의 광포함을 감당할 수 없어서) 멈추는 듯 느껴진다. 그 때 소리의 짧은 중단은 마치 곡의 진행에 불응하려는 제스쳐인 것처럼 생각된다. 두 번째 단절에서는 소리가 곡의 거둠에 조응하는 듯했다면, 첫 번째 단절에서는 스스로를 멈춰 세운 소리의 세기가 곡의 진행마저 멈춰 세우려는 듯하다. 소리들은 좀처럼 들리지 않더라도, 그 광포함만은 오히려 더 역동적인 활기를 가진 채로 남게 된다. 거기에서 소리는 사라지기보다는, 점점 거칠어지다 결국 임계점을 넘어 완전히 새로운 질감을 갖게 된다. 긴장은 같은 질감을 유지하며 커져가려는 소리와 결국 완전히 달라지고야 마는 소리의 질감 사이의 긴장이기도 하고, 소리들을 높여가려는 곡의 진행과 그에 불응하며 내리눌리는 소리들 사이의 긴장이기도 하다.

멎을 듯이 내리눌리는 답답한 노이즈들은 「Climate Setting」에서나 「Sweet Ramp」에서 이미 들을 수 있었던 것들이다. 그것들은 몇 번인가 되풀이되고서야 「수혈」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수혈」은 자신의 노이즈를 흘려듣도록 놔두지 않는다. 노이즈들을 더 무겁게 쇄도시키면서, 「수혈」은 극단적으로 팽팽한 긴장을 만든다. 비슷한 종류의 노이즈일지라도, 「수혈」에서 그것은 한층 더 공격적으로 들린다. 그것으로 『Dream Signal』은 다시 공포에 근접해간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의 해답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버크는 반복되는 소리들의 공포에 관해 흥미로운 예시를 하나 더 덧붙인다. 반복되는 소리들의 자극이 충분하기만 하다면, 설령 다음에 울릴 소리를 기대하고 예상하고 있다 하더라도, 아니 도리어 바로 그러한 기대로 인해, 그 소리에 놀라 두려워하게 될 수 있다고 적는다.10 버크는 묘사한다.

소리의 효과는 새로운 보조수단, 즉 기대를 통해서 상당히 증폭된다. 하지만 여러 번 자극이 있은 후에 더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하더라도 언제 그 자극이 있을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자극이 있으면 우리는 일종의 놀라움을 경험하며 따라서 청각기관의 긴장은 더욱 강화된다. […]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는 어떤 소리를 열렬히 기다릴 때면 언제나 반복될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소리가 들리면 어느 정도 놀라서 움찔하게 된다. 고막이 경련을 일으키고 온 몸도 따라서 경련을 일으킨다.

버크는, “열렬히 기다릴 때when at any time I have waited very earnestly”라는 구를 통해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셈이다. 설사 이미 익숙해진 소리들이더라도, 그것들은 충분히 무서운 것이 될 수 있다. 소리들은, 그것을 익히 듣고 있는 귀에도, 새로이 시끄러운 것으로서 부딪힐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소리의 자극만큼 그것에 대한 기다림 또한 충분히 강하다면, 소리들은 어느 때고 다시 시끄러울 수 있다. 버크가 열어놓는 가능성은, 네 곡이 재생될 동안 주구장창 노이즈를 듣고서도, 다섯 번째 노이즈 음악에서 다시 공포를 느낄 수 있다는 그러한 가능성이다. 「Colors; I’m here!」에서 되풀이되는 소리들은, 설사 어떻게 들릴지 대강 예견하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놀랍게 들릴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되풀이의 횟수가 누적됨에 따라 기대가 커져간다면, 소리들 또한 더 난삽해져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노이즈를 얼마나 예민하게 들을 수 있느냐의 문제다. 이미 익숙해진 소리들일지라도 그것들의 공격성을 흘겨듣지 않고 놀라운 것으로서 발견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기대 속에서, 곧 일종의 준비 속에서 듣는 소리를, 전혀 준비하지 못한 소리로 들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그러므로 이것은 새삼스레 발견하는 능력의 문제다. 발견은 한 편으로는 능동적인 활동이다. 그것은 소리들에 대한 기대와 준비를 통해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견은 한 편으로는 수동적인 활동이다. 기대한 소리가 무서운 것으로 들릴 때면, 그 소리들은, 마치 전혀 준비하지 못한 소리처럼, 깜짝 놀라게 만드는 것으로서 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발견의 능력은 준비하지 못한 것으로서 들릴 소리를 준비하는 능력일 것이다.

만약 시끄러운 소리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그리고 이미 노이즈에 익숙해졌다면, 아무리 시끄러운 노이즈라도 또한 주의를 받지 못한 채 흘러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수혈」에서 주어진 해답 또한, 새삼스레 발견하는 귀가 없다면 주어질 수 없었을지 모른다. 발견의 능력이 없었다면, 「수혈」의 노이즈도 단지 첫 곡과 두 번째 곡에서 이미 들어본 것으로서 지나갔을지 모른다. 저 새삼스레 발견하는 귀는, 그러므로 『Dream Signal』을 끝까지 현기증 나는 음악으로 듣기 위한 조건일 것이다. 그 발견 안에서 노이즈는 끝끝내 시끄러울 것이다.

ㄷ.  

키세와의 『BULLET BALLET』의 라이너 노트에서 이승린은 이렇게 쓴다. “노이즈를 다루는 음악가에게 노이즈는 표준(norm)에서 벗어난 소리가 아니라 이미 표준이다.”

노이즈를 만들거나 골라내어 틀거나 듣거나 하는 등의 활동들(곧, 노이즈를 다루는 활동들)에서는 노이즈가 표준으로 기능할 것이다. 명목적이지는 않더라도 노이즈가 무엇인가에 대한 합의가 있을 것이며, 노이즈 음악가의 활동은 그렇게 결정된 노이즈의 산출을 목적한다. 그리고 그 표준에 따라 노이즈는 서로 견주어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승린은 “표준” 옆에 “norm”을 다시 적는다. 규범은 정확한 어휘다. 무시무시한 노이즈를 힘껏 분출하는 것은 인더스트리얼 음악의 규범이다. 이미 노이즈는, 적어도 어떤 영역들에서는, 그 영역들에서 어떤 소리들이 울리고 들려야 하는가를 결정하고 준비시키는 노모스다.

종래의 표준들에서 벗어나 있던 소리들이 다시 표준이 되었다는 것. 음악적 재료로 식별되지 않던 소리들을 중심으로 음악이 만들어진다는 것. 지배적 질서가 거부한 소리들이 모여 자신들의 고유한 질서를 새로이 만들었다는 것. 낯선 일은 아니다. 노이즈 음악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오래된 체제로부터 해방된 음향들은 다시 다른 조직화의 질서를 찾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바레즈에게서 그랬다.11

그러나 한 구석에서는 여전히 기이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아마 노이즈라는 이름 때문일 것이다. 노이즈가 노모스가 되어버렸다는 역설적인 진술은 곧장 하나의 물음을 제기한다. 노이즈가 표준적인 소리가 되었을 때, 노이즈는 더 이상 노이즈이기를 그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달리 적자면, 표준적인 소리가 노이즈일 수 있을까? 하나의 표준에 부합한다면, 그 표준에 따라 만들어졌다면, 그 표준이 제시하는 조건들을 만족했다면, 그것은 노이즈인가?

왜냐하면 노이즈는 오직 거부당했다는 술어를 통해서만 정의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리오타르는 이렇게 쓴다. “거부된 소음들, [……] 만약 그것들이 들린다면, 그것은 불협화음들로서, 그것들을 수용하고 음악으로 변형시킬 준비가 되지 않은 장치들 안으로의, 소리 흐름들의 진입으로서 들리는 것이다.”12 요컨대 노이즈는 준비되지 않은, 선별되지 않은, 예상치 못한, 걸러지지 않은 불순물로서만 들린다는 것이다. 만약 음악이 소리들의 조직화라면, 반-음악적 소리로서만 들린다는 것이며, 오직 규범이 허락하지 않은 것으로서만, 표준에서 이탈한 것으로서 들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이즈에 대한 하나의 오래된 규정이다. (하지만 결코 유일한 규정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규정은 노이즈의 조건들을 설정하도록 이끈다. 준비되었다면 노이즈가 아니고, 선별되었다면 노이즈가 아니고, 예상할 수 있다면 노이즈가 아니다. 노이즈는 일종의 부정신학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이르건대 노이즈는 음악적 규범들이 요구하는 자격을 갖춘 그런 소리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음악적 소리’로서의 자격을 갖춘 소리는 노이즈가 될 수 없다고 쓰는 것은, 거꾸로 노이즈의 자격이 무엇인지를 쓰는 일이다. 노이즈의 자격을 따진다는 것은 이미 스스로 역설적이고, 그렇기에 또 다른 물음들이 제기된다. 노이즈의 자격을 결정하는 것은 가능한가?

자격 없는 소리로서의 자격을 갖춘 소리들만을 노이즈라고 이르겠다면, 자격이 없어야 한다는 자격을 갖췄을 때 노이즈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노이즈가 노이즈로서의 자격을 갖춘다면, 그것은 하나의 자격을 만족시킨 셈이므로, 노이즈들의 고유한 영역에서 탈락하고야 말 것인가? 그리하여 노이즈는 노이즈가 되자마자 또다시 노이즈이기를 그치게 될 것인가? 그리고, 자격을 갖췄다는 바로 그 이유로 노이즈로서의 자격을 잃었을 때, 또다시 역설적이게도, 쫓겨난 노이즈는 자격을 박탈당했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다시 노이즈가 될 것인가?

자격 박탈로서의 자격 충족, 그리고 다시 자격 충족으로서의 자격 박탈, 또 다시 자격 박탈로서의 자격 충족……. 노이즈는 이 역설에서 저 역설로, 다시 저 역설에서 이 역설로 옮겨 다닌다. 노이즈를 다루는 활동들이 수행되는 한에서, 그리고 그 활동들이 하나의 무리 또는 여러 무리를 이루는 한에서, 반-표준화와 표준화 사이를 오가는 노이즈의 동요는 멎을 수 없을 것이다. 노이즈 음악이란, 노이즈가 그 둘 사이를 순회하며 그리는 궤적에 둘러싸인 영역의 이름이다. 결국 노이즈는 단일한 규정에 고정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13

장희진은 마지막 곡에 “Morning Call”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Dream Signal”이라는 제목이 노이즈들을 꿈이라는 낱말로 설명하려 한다면, “Morning Call”은 꿈이 어떻게 끝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선택된 제목일 것이다. 「Morning Call」은 「Brinvilliers’ Throat」에서 들었던 높은 음조의 고동 위를 뒤덮으며 다가오는, 더 차갑고 날카로운 소음으로 앨범을 끝낸다. 1분 5초 무렵부터 들리는 그 높은 전자음은 잔뜩 신경을 긁어대며 길게 울리다 요동치고 사라진다. 

누군가는 그 소리들을 듣자마자, 즉각적으로, 거의 자동적으로 혐오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재미난 것은, 그런 혐오감을 내비치는 것이야말로 시끄러운 음악들의 힘을 가장 높게 평가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 우연히 「Morning Call」을 듣고는, 그 소리가 무엇인지 알게 되기도 전에, 바로 그 소리에 거부감을 느끼고 짜증을 내며 그 소리들을 비난했다고 해보자. (대개 모닝콜은 언제 듣든 짜증나는 소리들이다. 단잠을 깨우는 모닝콜보다 더 듣기 싫은 노이즈를 생각하기도 힘들 것이다. 나는 매일 아침 모닝콜을 비난하고는 한다.) 그는 「Morning Call」을 거부하고 비난함으로써, 스스로는 뜻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Morning Call」에 대해 모종의 존중을 내비친 것이다. 그는 그 곡의 자극에 그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다. 그 소리가, 소리의 정체와는 상관없이 거부감이 들만큼 강력하며 급진적이라는 것을, 그는 자신의 민감한 반응을 통해 입증시켜준 것이다. 「Morning Call」이 귀에 들어오는 즉시 그가 느끼게 된 짜증의 강도만큼, 그의 귓전에서 「Morning Call」은 보다 센 음악이 된 것이다. 그가 던진 비난의 강도는 노이즈의 강도의 척도가 되어줄 것이다. 비난당한 노이즈가, 비난당하는 그 순간 비로소 제 자극의 세기에 어울리는 격조와 품위를 갖추게 된 것이다. 노이즈에 대한 비난은 노이즈에 대한 가장 영광스런 찬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비난을 뱉지는 않을 것이다. 이 곡은 일곱 번째 곡이다. 이미 「수혈」을 듣고 온 청자가 구태여 「Morning Call」의 노이즈가 듣기 싫다며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Dream Signal』을 다 들은 청자라면, 앞서 우연히 「Morning Call」을 듣고는 진저리를 쳤던 저 누군가만큼 예민하게 노이즈를 듣기는 어려울 것이다. 『Dream Signal』을 다 들었다면, 청자는 이 앨범의 소음들 다른 것들에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너무 자주 소리들을 비교했다. 이를테면 어떤 곡이 다른 곡보다 더 시끄럽다든가 하는 식으로 소음들을 서로 비교하기도 했고, 소음을 듣는 일을 심전도를 보는 일에 견주기도 했다. 우연히 「Morning Call」을 듣게 된 저 청자는, 노이즈를 단적으로 시끄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 소리보다 시끄럽다거나 저 소리만큼 시끄럽다는 식으로 들은 것이 아니라, 그저 시끄러운 것으로 듣는 것이다. 그 때 소리는 어떤 것에 견주었을 때 강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자신만으로도 강한 것이다. 그러나 『Dream Signal』에 주의를 기울이는 청자의 귀에서 노이즈는 단적으로 시끄러운 것이 아니다. 앞의 곡만큼, 아니면 앞의 곡보다 더, 또는 심지어 앞의 곡만 못하게 시끄러운 것으로 들리는 것이다. 벽지 패턴에 빗대어 노이즈를 묘사하면서, 나는 노이즈를 단적으로 기분 나쁜 것이 아니라 난잡한 무늬만큼 기분 나쁜 것으로 들은 것이다. 꿈이나 도시 같은 은유들도, 소음들을 다른 사물과 견주고, 그 사물들을 매개하여 소음들을 설명하려는 비교들일 것이다.

소음에 고통 받은 저 누군가와, 『Dream Signal』을 비교하는 주의 깊은 청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후자의 경우 소리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으로 튀어나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반응은 소리를 다른 것에 견주어 본 뒤에, 비교라는 매개를 거쳐 튀어나올 것이다. 그러나 전자에게서 반응은 직접적인 만큼 즉각적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반응은 소음들을 다른 것에 견주어보거나 다른 것을 통해 설명해볼 새도 없이, 단 한 순간이라도 견딜 수 없어 튀어나온 반응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소음은 직접적인 폭력이다.

여기 세 종류의 귀가 있다. 첫 째로 아무런 준비 없이 소음을 듣게 된, 비난자의 귀가 있다. 이 귀는 소음에 익숙하지 않은 귀다. 그 뒤로 소음을 익히 들어 본 귀들이 있다. 소음을 비교하는 귀가 우선 그렇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미 소음에 익숙해졌다 하더라도, 다음 번 소음을 마치 처음 듣는 소음처럼 듣고자 준비하는 귀가 있다. 이것이 새삼스레 발견하는 귀다.

세 개의 귀를 따라, 노이즈 또한 셋으로 갈릴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난데없이 단적인 것으로서 들리는 노이즈가 있겠다. 비교 가능한 노이즈도 있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새삼스레 단적인 것으로서 발견된 노이즈가 있겠다. 노이즈의 개념은 그것을 다루고 듣는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내게 마지막 귀는 특별해 보인다. 그것은 처음 노이즈를 듣던 그 때의 그 파괴성을 다시금 되찾으려는 귀다. 시끄러운 소리의 파괴성은 드문 것이고, 드문 만큼 강한 흥분을 몰고 온다. 저 마지막 귀가 맞닥뜨리는 노이즈는, 다시 파괴적이게 된 노이즈다. 그것은 표준이 결정하는 범위 안에서 다시 반-표준으로 기울어져 나간 노이즈다.

노이즈는 이미 한 장르의 이름이다. 이 장르 안에서 노이즈의 드문 파괴성을 다시 찾아내려는 노력은 노이즈를 새로이 시끄럽게 즐기려는 노력일 것이다. 그리고 그 파괴성의 재발견은 실상 노이즈 음악의 재생산과 재수용이 언제나 겨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앞서 언급한 라이너노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광기 어린 습격을 즐겁게 맞이하고 싶다.” “습격”은 적어도 표준이 된 노이즈가 단지 표준으로서만 들릴 수 있는 것은 아님을 기술하는 낱말로 읽힌다. 노이즈를 습격으로서 맞이하려는 귀에는, 규범 안의 노이즈는 다시 광기 어린 소리로 들릴 수 있을 것이다. 그 기대와 함께, 나는 다시 시끄럽게 듣기 위해 첫 곡으로 돌아간다.

  1. 강지혜, 「야간 공사」; 『내가 훔친 기적』, 민음사, 2017년, 56쪽.
  2. 염승숙, 「없는 미래와 굴착기의 속도」, 2017년, 경향신문.
  3. 박솔뫼, 『도시의 시간』, 민음사, 2014년, 143쪽, 82쪽,
  4. 다행이든 불행이든, 레코드는 결국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레코드는 쉽사리 맛이 갈 수 있는 물건이다. 판은 마모되기 마련이고, 이어폰은 언제든 갑작스럽게 고장날 수 있다. 항상 똑같은 환경에서 레코드를 들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레코드가 저장된 소리를 똑같이 재생할 수 있는 그런 ‘정상적인 상황’은 기실 몹시도 드문 상황이다. 레코드가 소리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레코드는 분명 더 엄격한 제어이기는 할 것이다.
  5. 이러한 처지는 우연성 음악을 처음 듣는 청자의 처지에 유비될 수도 있겠다. “아직도 문제가 되는 것은 순진한 청취자의 경우에는 우연성 작품에도 고정된 순서가 있다는 점이다. 그는 단 한 번의 연주를 듣는 것만으로 형식이 유동성을 가졌다는 인상을 받을 수는 없으며, 레코드를 듣는 경우는 더 어렵다.” (P. 그리피스, 현대음악사, 신금선 역, 이화여대출판부, 1994, 197쪽.)
  6. 나는 바신스키의 『The Disintegration Loops』를 생각한다. 바신스키는 테이프에 소리를 녹음한 뒤 그것을 여러 번 돌렸다. 루프는 테이프 헤드를 지날 때마다 손상되었고, 여러 차례 돌아가고 난 뒤에는 처음과 다른 소리를 내었다. 바신스키는 테이프가 닳아가며 음악의 불확실성이 증가해가는 과정을 녹음했다. 그러나 앨범을 듣는 것만으로는 그 불확실성을 확인할 수 없다. 앨범을 재생할 때 되풀이되는 것은, 녹음과정에 개입한 그 불확실성이 아니다. 도리어 나는 그 앨범의 내용들을, 꽤나 강한 확신을 가지고 기억할 수 있으며, 앨범을 재생함으로써 그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다. 나는 음원 손실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The Disintegration Loops』를 반복재생할 수 있고, 『The Disintegration Loops』는 재생될 때마다 별다른 종류의 불확실성을 수반하지 않고 반복된다. 내 아이폰과 이어폰은 적어도 바신스키의 테이프보다는 튼튼하기 때문이다.
  7. 버크는 가령 다음과 같은 소리들을 나열한다. 엄청나게 큰 소리들, 이를테면 폭포, 폭풍우, 천둥, 대포;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하게 시작하거나 중단하는 소리들; 떨리면서 빠르게 간헐적으로 들리는 소리들; 나지막하고 불확실하며 알아듣기 힘든 소리; 적막; 짐승이 내는 소리 등등……. E. 버크, 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김동훈 역, 마티, 2006, 136-139쪽 참조.
  8. 같은 책, 139쪽 이하, 그리고 177쪽 참조.
  9. 같은 책, 106쪽.
  10. 같은 책, 200쪽.
  11. 이희경, 새로운 ‘소리’를 찾아서: 바레즈를 통해 본 20세기 음악의 경계들, 낭만음악 7권 제 4호, 2005, 166쪽 참조.
  12. J-F. Lyotard, Plusieurs silences; dans Des Dispositifs Pulsionnels, Editions Galilée, Paris, 1994, 199p.
  13. 김경화, 노이즈의 역설: 유토피아적 실현인가? 디스토피아적 상상인가?, 음악논단 38집, 2017, 149-179쪽 참조. 이중 노이즈의 개념적 유동성에 대한 개괄을, 다소 길지만 인용하도록 하겠다. “우리가 어떤 소리를 노이즈로 듣는다면 그 소리는 우리의 인식 틀 밖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귀에 거슬리는 소음으로 여겨진다. 반면 그 노이즈가 귀에 전혀 거슬리지 않고 심지어 아름답거나 매력적으로 들리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질서 안으로 조화롭게 녹아들어 더 이상 소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소음은 매력적일 수도, 여전히 위협적일 수도 있다. 따라서 소음을 하나의 고정된 개념으로 정의하거나 단정지어 논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특정 사운드가 청자의 인식 체계에 어떠한 관계로 작용하는지를 통해 소음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비단 소음이라는 특정 소리가 우리의 인식과 맺는 관계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이는 소음이 시스템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논의로 환원될 수 있다. [……] 노이즈는 청각적으로 ‘불쾌감’을 주거나 ‘공격적인’ 소리이다. 정도가 심하면 청각에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이즈가 음악 안에서 컨트롤될 때 이러한 폭력성이나 부정적 잠재성은 사라진다. 시스템 안으로 조직되어 들어온 노이즈는 오히려 음악 질서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운드 요소로 녹아든다. 이때 노이즈는 더 이상 불쾌하거나 폭력적이지 않은 매력적일 수 있는 사운드로 길들여진다. 그러나 한편 노이즈는 여전히 폭력과 위협의 기제로 작동하면서 구조 안으로 통합되기를 거부한다. 과도하게 증폭된 볼륨이나 거칠고 극단적인 노이즈를 추구하는 음악은 우리에게 더욱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음악 안에서 노이즈의 정체성은 언제나 고정적이지 않다.”(같은 글, 151-2쪽.)

댓글 남기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