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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경, 『속꿈, 속꿈』

   

사실 본 필자는 신해경의 작품 『속꿈, 속꿈(이하 본작)』을 듣고 그에 관해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은 이후 계속해서 몇 가지 고민을 해왔다. 본작에 관해 서술하는 데에 Beach House 등으로 대표되는 드림 팝이나 My Bloody Valentine과 Spiritualized와 같은 이들로 대표되는 슈게이징과 같은, 그러한 세부 장르를 묘사하는 어구가 필수적이라면, 본작은 어떠한 방향으로 서술되어야 하는가, 혹은 만일 신해경이 본작의 작업 기간 내도록 이들의 이름을 의식하고 이들의 유산을 계승하길 원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이고 그 근거는 무엇인가와 같은. 또 있다. 전작 『나의 가역반응(2017)』과 본작이 연관이 있다면 그것이 나의 감상에 큰 영향을 끼칠 정도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것인가와 같은 다소 덧없는 질문들. 결국, 이 질문들이 본 필자에게 더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질문들이 아니게 되었다. 물론 세간의 평가와 그것에서 발견되는 모든 수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의 가역반응』과 본작이 사랑이라는 공통된 주제에서 파생된 심상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고, 아마도 「회상」, 「그 후」의 가사와 기악적 구성이 「화학평형」에서 빌려진 것 역시 그 이유가 될 것이다. 또한, 본작의 경우 드림 팝이라 불리는 음악들이 으레 그렇듯 몽환적인 효과를 위한 리버브와 딜레이, 피드백이 공격적으로 활용되었고, 그 구성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기타의 활용에 관한 방법론은 슈게이징에서 그 근간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본작을 둘러싼 담론들은 모두 어쩌면 부정이 어려울 정도로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들이 본 필자에게 와서 전부 「접몽1」이라는 단어로 귀결되어 버린 이유는, 본 필자에게는 본작이 장르적 전유물이나, 혹은 전작과의 연계의 결과물이 아닌 독자적인 무언가로 읽히기 때문이었다. “Beach Boys, 어떤날, My Bloody Valentine 그 누구도 아닌 신해경.” 그러니까 꿈이라는 소재, 몽환적인 사운드 디자인, 노이즈가―돋보이나 전작의 그것보다는 깔끔한 형태로―섞인 기타 소리의 활용은 신해경이 특정 장르에서의 방법론을 구사하기 위해 사용했다기보다는 그저 하나의 재료로써 차용한 것에 가깝게 느껴졌다는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장르 간의 경계가 그 어느 때보다 불분명해진 현재에 와서는 앞서 언급한 요소들이 어떠한 장르에서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기에, 이러한 것에서 세부 장르적 특성을 찾는다는 것이 영 어색하기도 했다. 결국, 본 필자의 감상은 꿈이라는 단어 자체에 천착하게 되었고, 그것은 곧 본작과 전작 간의 연결고리를 일정 부분 상쇄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신해경 본인은 본작이 『나의 가역반응』의 다음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만들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말을 한 것으로 보아 본작을 독자적으로 해석한다 해도 꽤 유효한 해석을 끌어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겠다.

본작의 타이틀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일단 결론적으로 속꿈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본 필자가 속꿈이라는 단어를 입력하자마자 아래에 바로 빨간 줄이 쳐지는 것을 보면 명확한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 「그 후」의 뮤직비디오를 보도록 하자. 잠에서 깬 주인공을 배경으로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 아리송한 문구는 20세기 초반 활동한 소설가 이상의 단편소설 <날개>의 종결부에서 등장하는 대사로서, 이상 본인의 좋지 못했던 연애 경험에 꿈이라는 탈을 씌우는, 그러한 일종의 거짓말을 자기방어적인 목적으로 사용해왔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문장이다. 그래서 이게 본작과 무슨 관계냐면, 본작의 타이틀 『속꿈, 속꿈』이 저 문장의 줄임말로 보인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이것은 신해경이 알려진 대로 이상의 팬이기에 꽤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다2. 다만 앞서 언급한, 이상이 꿈이라는 소재를 활용하는 방법과 신해경의 그것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신해경은 꿈이라는 소재를 더는 만날 수 없는 이전 연인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적 요소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신해경에게 꿈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고, 어떤 말도 바꿀 수 없는” 공간일 것이고, 동시에 “끝이 없는 기쁨”일 것이며, 신해경은 자신이 원하는 이상향에 닿기 위해 꿈으로서 자신을 속이고, 또 그 속임에 기꺼이 속아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해경은 본작에서 이별을 겪은 한 사람으로 화한다. 가슴 아픈 이별을 일단 외면하기 위해 꿈을 찾아가는 것은 결국에 전형적인 현실도피로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이상이 꿈이라는 소재를 활용하는 방법―자기방어적 기제―과 신해경의 그것이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 후」에서 “우린 참 바보 같아. 떠나갈 걸 서로 모른 척해.”라며 이전 연인과의 관계가 망가진 것을 자조하며 “내일은 오늘보단 괜찮아질 거야.”라고 잠을 청하는 모습이 그렇고, 「어떤날」에서 서로가 서로를 떠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대 슬퍼하면 나는 곁에서 떠날 수 없어.”라고 말하는 모습이 바보 같기도 하다. 그렇기에 신해경은 꿈을 찾아간다. 사실 신해경은 꿈속에서마저 그대라고 칭하는 그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여전히 그에게 「그대는 총천연색3」이기에 생생하지만, 당연하게도 꿈속의 그대는 실재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 지점에서 신해경은 절규한다. “잠시만 그댈 잊게 해줘. 아주 슬퍼도 그댈 찾을 수 없게.” 그에게 필요한 건 관계의 회복이 아니라 실재하는 그대를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나보는 것이다. “잠시만 그댈 만나게 해줘. 홀로 지샐 밤 다시 그대처럼 빛나게.”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는 그대를 어떠한 방법으로도 만날 수 없고, 꿈속에서마저 혼자일 것이기에 「독백」한다. “매일 밤 슬픔 속에 숨져가는 나를 찾아와줘요.” 그러한 갈증이 느껴지는 「독백」은 듣는 이도, 들어줄 길도 없기에 「접몽」 즉, 덧없음이란 단어로 남아버렸다. 사실 이러한 과정들은 단순히 신해경 혼자만이 겪어본 일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이별을 겪고 남은 자가 되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일에 가깝다. 이별에 아파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하고, 또 그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러한 과정들은 어쩌면 만인 공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한 점은, 누구나 예외 없이 현실의 삶을 지속해야만 한다는 점이고, 이 점은 곧 꿈에도 끝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것은 신해경도 마찬가지이고, 「그대의 꿈결」에서의 가사로서 수신자 없는 외침을 남겨놓는다. 그렇게 한 송이의 「크로커스4」가 된 신해경은 「꽃 피는 계절처럼」에서 이렇게 말한다. “다 아직 그대로 있다고 전할게.” “난 항상 견딜 수 있다고 말할게.” ‘언젠가 우리는 다시 만날 거에요. 끝이 없는 기쁨 속에서.“ 그렇게 신해경의 꿈은, 그토록 바라던 그녀와의 재회를 이루지 못한 채 끝이 나 버린다.

신해경의 꿈이 진행되는 내도록 우리는 전지적 시점에서 그와 함께 해왔다. 물론 요즘 세상에 33분의 길이라면 그렇게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길이의 앨범이겠지만, 그래도 그 시간 동안 신해경이 계속해서 흡인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뭐 이유는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는 것이, 식상하겠으나 소리 그 자체가 굉장히 매력적이라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악기에 관한 부분이 아니다. 악기 자체는 『나의 가역반응』과 비교했을 때 아주 새롭지도 않고,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구태여 서술할 필요성이 덜한 편이다. 각설하고 본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목소리에 일관적으로 걸린 딜레이, 피드백, 리버브와 같은, 이어폰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음악을 통해 공간감을 느낄 수 있게, 다시 말해 시청각적 경험을 도와주는 효과들은 문학적 감상을 끌어낼 수 있도록 충분히 그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이고, 신해경이 자신의 음악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용하는 몇 가지 기술들이 본작에 와서 꿈이라는 소재와 결합했을 때 꽤 그럴듯한 시너지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저역대의 소리에서 차이를 만들어내며 본작의 소리를 조직하는 과정에 관해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겠다.

신해경이 본작에서 저역대의 소리를 공격적으로 내세우는 경우는 많지 않다―사실 그마저도 매우 공격적이라고 볼 수 없다. 작업 과정에서 목소리의 경우 극단적으로 저역대의 소리를 소거하고, 우리의 고막을 강하게 타격하는 것이 정박에서 나오는 킥 혹은 신시사이저, 베이스의 연주가 한 번에 들리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그럴 것이고, 전반적으로 전작에서 들려주는 노이즈 역시 본작에서는 그 정도가 줄었다는 점에서 본 필자의 의견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 후」의 전반부나 「꽃 피는 계절처럼」의 전반부가 이런 부분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인데, 이와 반대로, 저역대의 소리가 필히 돋보일 「그 후」의 후반부나 「접몽」같은 트랙들에서, 특히나 「접몽」이라는 단어 자체에 의해 본작의 서사가 다르게 읽히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본작에서 들리는 저역대의 소리는 꿈과 현실을 구분 짓는 척도로 보인다. 맞다. 신해경은 계속해서 꿈속에 있었다. 하지만 이별을 경험한 이라면 모두가 알듯이, 어쩌면 신해경은 현실에서 역시 그것에서 달아나려는 것일지도 모르고, 한 번 찾아갔던 꿈이라는 공간을 계속해서 찾아가는 동안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것을 경험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날을 레퍼런스 삼은 듯 보이는 「어떤날」이 어색할 정도로 꿈으로 찾아가는 과정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고, 「꽃 피는 계절처럼」이 서정적인 분위기로 시작하다가 꿈에서 깨는 마지막 장면에서 기타를 거칠게 다루는 것 역시 아마 이와 비슷한 이유일 것이며, 「접몽」은 그런 면에서 본작 내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서술은 본 필자만의 해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 그랬던가. 천 명의 사람이 있으면 천 명의 감상이 있는 법이라고. 물론 언니네 이발관의 『가장 보통의 존재(2008)』와 같이 아티스트 본인이 작품을 해석하는 방법을 직접 제시하거나 노골적으로 작품 내에 의도를 드러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해경은 본작에 관한 해석을 청자의 자유에 부쳤고, 본 필자 역시―그렇다고 방패막이 삼는 것은 아니지만―자유로이 해석이 가능한 본작을 감상하며 그에 관한 생각을 글로서 정리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본작이 해석될 수 있는 방향은 다양하다. 장준환은 장르적 전유와 가치를 언급하며 감상적인 평을 제출했고, 서정민갑은 어쩌면 인간 천연의 본성일지도 모르는 간절한 그리움을 감상의 키워드로 내건 평을 제출한 바 있다. 그들과 비교했을 때 어쩌면 본 필자의 글이 과대해석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저 ”천 개의 감상“ 중 하나일 뿐이고, 이것 역시 나름대로 합리적인 과정을 거친 해석이다. 하지만 하나 말할 수 있는 것은, 신해경이라는 뛰어난 연출가가 만들어낸 본작이 아주 예쁘고 아름답다는 점이고, 이 점은 아마 모든 청자가 공감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상실이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하지만, 본 필자는 이러한 말들이 위험하다고 느낀다. 그 대신 우리는 그 상실을 이겨낼 수 있는 과정이 될지도 모르는 하나의 방법을 적실히 묘사한 본작을 감상하며, 그렇게 적실히 묘사할 수 있음에 감탄하며 신해경과 마주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본 필자의 말에 공감할 수 있는 우리 모두는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러한 꿈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본작, 신해경의 『속꿈, 속꿈』은, 결코 쉽게 잊히지 않을 작품이라고 본 필자는 믿는다.

   
  1. 호접지몽(胡蝶之夢)의 동의어. 장자가 나비가 되어 날아다닌 꿈에서 유래했으며, 속뜻으로 현실과 꿈의 구별이 어려움, 혹은 인생의 덧없음이라는 의미가 있다.
  2. 여담으로 신해경의 이름은 이상의 본명 “김해경”에서 빌려서 만든 이름이다.
  3. 總天然色. 완전한 자연 그대로의 색을 의미하는 고사성어. 그만큼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듯 보인다.
  4. Crocus. 붓꽃의 일종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며 고통스러워하는 크로커스를 신들이 가엽게 여겨 같은 이름의 꽃으로 만들어주었다는 그리스 신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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