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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닉픽션, 『유령의 집』

나는 『유령의 집』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좋아한다. 이를테면 나는 “웃음음악”이라는 이름이 붙은 곡에서 웃음소리가 나는 건 어쩌면 조금은 뻔한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 웃음소리들이 난삽하게 얽혀 서로를 방해하거나 침범하며 어지러운 소리-덩어리를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곡이 시작하면서 들리기 시작하는, 샘플들보다 더 난삽하고 복잡한 비트도 좋다. 그 복잡한 비트 끝의 쥐어짜는 듯한 소리도 좋다. 그리고 그 뒤로, 직전보다 훨씬 단순한 비트가 나오며 전후 리듬들이 대조되는 것도 좋다. 나레이션이 들려주는 우스꽝스런 이야기도 좋다. 한 초등학생이 가방 속에 머리를 넣고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고 한다. 나레이터가 말을 더듬거린다는 건 특히나 내 마음에 쏙 든다. 그 우스꽝스런 이야기는 어느 시점에서부터 일종의 비판적 관점에서 제시된 유비의 한 항으로 삽입되면서 어떤 무거운 교훈 속으로 갑작스럽게 통합되려 할 것이다. 그 비판적 관점이라는 게 가만히 듣다보면 대단히 진부하고 상투적이며 불명료한데, 나레이터는 어설프게 명석한 체를 하면서 교훈을 뱉어낼 것이다. 그것은 사실 앞서의 우스꽝스럽던 이야기만큼이나 우스운 연설이다. 나는 그것이 우스워서 좋다. 곧 이어 나레이터가 자신의 진부하고 상투적인 비판적 교훈을 창작의 계기로 삼으려 한다는 계획을 풀어놓으려는 바로 그 때 갑작스레 노래가 끝마쳐진다는 점은 더더욱 좋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은 나레이션에서 마이크 잡음이 대단히 심하게 들린다는 것이다. 잡음도 심할 뿐더러 중간에 중단되기 때문에, 나레이터의 교훈적 연설이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 좋다.

그렇지만 어떤 노래들에 대해서는, 이런 식으로는 쓸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노래들은 (그리고 어떤 관점들은) 더 신중한 방식의 서술을 요구하는 듯하다.

지금부터 “『유령의 집』”은, 첫째로는 지난해 발매된 소닉픽션의 음반의 제목을 표기하기 위해 쓰일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지난해 소닉픽션이 기획하여 나선프레스에서 출간한 도서의 제목을 표기하기 위해 쓰일 것이다.

아래에서 주로 다루게 될 것은 음반 『유령의 집』이다. 『유령의 집』들은 서로 묘한 상호참조를 주고받는다. 이를테면 「Yogamat」와 「Dream Eat Dream」, 「Dream Together」 등의 표제는 「파라파라」와 「꿈~리듬」, 「꿈은 이렇게 시작한다」 등을 지시하거나 또는 그것들에 의해 지시되는 듯 보인다. 책에 적힌 몇몇 문장들이 가사로 다시 적히는 (또는 그 반대일 수도 있을) 경우들도 있는데, 이를테면 「Violent Enough」와 「골목」 등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이 글에서 도서 『유령의 집』은 음반과 동등하게 다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필요할 때마다 책에 대해서도 쓸 것이지만, 주제가 될 것은 앨범이다.

“유령의 집”은 책과 음반 뿐 아니라 소닉픽션이 기획하고 연주했다는 공연의 이름이기도 하다. 공연은 작년 11월 22일과 23일 양일 간 문래예술공장에서 열렸다고 한다. 나는 공연에는 가지 못했다. (나는 그 공연 한 달 전에 열렸다는 <소닉픽션영화제 2019>에도 가지 못했다.) 이 글은 책과 함께 음반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공연을 경험하지 못한 채 쓰였으므로, 어쩌면 『유령의 집』에 대해 반드시 쓰였어야만 할 무언가가 이 글에는 누락되어 있을는지도 모른다. (단지 공연에 대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A

 

『유령의 집』을 다 듣기란 조금은 버거운 일이다. 다른 게 아니라 다 듣자면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 앨범의 가장 또렷한 특징은, 버거울 정도로 노래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 눈에 바로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 트랙 리스트만 봐도 번호가 39번까지 내려간다. “너무 많은 트랙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제작 과정에서도 나온 듯하다. 마지막 곡만 해도 20분 남짓 하는 마당에, 이 정도로 긴 레코딩은, 클래식 음반사에서 나온 레코딩들이 아니고서는, 결코 흔한 편은 아니다. 『유령의 집』은 꽤나 과하다. 수록된 트랙들의 개수와 재생 시간의 과잉이 이 앨범의 첫 번째 개성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과잉이 덧붙는다. 『유령의 집』에는 하쉬 노이즈 월 넘버도 있다. 「Wifi」가 그렇다. 생각보다 트렌디한 랩 넘버도 있다. 「빙빙」이 그렇다. R&B 가요 넘버도 있다. 「Seoul Map」이 그렇다. 펑크 넘버도 있다. 「빈방」이 그렇다. 「Dust in My Mind」는 앰비언트 풍의 드림팝 넘버다. 이 앨범엔 별의별 종류의 노래들이 산만하게 수록되었다. 단지 재생시간이나 트랙수의 양적 과잉 뿐 아니라, 각 트랙들의 이종성異種性에도 과잉이 있다.

이 난삽한 배치 안에서, 일종의 위계라고 부를 법한 것이 흔들린다.

노이즈 트랙이 여러 곡 있으니 『유령의 집』은 대강 보기에 노이즈 앨범으로 보일 것이다. 「fire」나 「Tunnel Boring Enough」, 「Tongue」 같은 곡들 사이에서는, 「일부터열까지」나 「첨벙」 같이 보다 익숙하고 흔하며 더 서정적이고 어쨌든 가요에 더 가까운 듯 들리는 곡들이 오히려 더 이질적이고 낯설다. 노이즈 트랙들 사이에 끼어들면서, 가요는 유별난 음악이 되어버린다. 노이즈가 자주 들릴 때, 그래서 그 앨범 안에서는 노이즈가 익숙할 때, 모르긴 몰라도 다음 트랙은 아마 노이즈 트랙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일반적이게 될 때, 가요는 노이즈 트랙들만큼이나 노이즈처럼 들린다. 거기에서는 가요도 노이즈가 된다.

『유령의 집』은 노이즈들의 번잡한 요새를 구축한다. 거기에선 노이즈가 아닌 것도 노이즈 같이 들리기 때문에, 무엇이 노이즈이고 무엇이 노이즈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없다. 『유령의 집』 안에서 모든 것은 사이좋게 섞여든 노이즈다. 표준과 비표준, 주류적인 것과 비주류적인 것들 사이의 구분은 모호하다. 여기에서는 가요도 하쉬 노이즈만큼이나 이상하고 별나다. 그러므로 『유령의 집』에서는, 하나는 노이즈고 다른 하나는 편안한 소리라는 식으로 퍼즈 걸린 기타와 피아노를 구분할 수 없다. 둘은 유별나고, 따라서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 트랙들의 이종성은 트랙들의 동등성으로 이행한다. 『유령의 집』이 세운 요새 안에서, 각각의 소리들은 같은 층위에서 서로 다른 음색을 낼 것이다.

 

나는 「Daiquiri」의 첫 2분 동안 수수한 톤의 기타 리프가 단조롭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위스키와 럼은 싫어한다. 더블 샷이라면 더 싫다. 다이쿼리1를 마셔본 적은 없지만 나는 칵테일이라면 대체로 싫어하므로 아마 다이쿼리도 싫어할 것이다. 난데없이 괴성을 내지르는 것은 좋다. 괴성을 내지르는 중 호흡이 고르지 못해 “흘러가는 옥상” 가운데 “흘”과 “러” 사이에서 급히 숨을 들이마시는 것도 좋다. 시원하게 후려치는 뒷부분이 좋다. 2분 40초를 넘기고부터 왼쪽에서 들려오는, 가장 지저분한 톤의 기타가 좋다.

그러나 더 작고 복잡하고 지저분한 것도 좋다.

『유령의 집』 안팎에 몇 가지 종류의 술들이 있다. 유기농맥주의 페일 에일은 클리핑이 뜰 때까지 출력을 올려 전기적 환각을 내리붓는다. (「IPA」; 『One Take Brewing; Settlement』.) 악어들의 소주는 잠도 안 오고 돈도 없고 약속도 파투난 밤 마치 비처럼 내린다. (「여우소주」; 『물고기였으면』.) 그리고 다이쿼리가 있다.

『유령의 집』의 다이쿼리는 우디, 삼목, 백단, 그리고 버지니아 담뱃잎 향 가운데에 내리부어진다고 한다. 그 냄새들 한복판에, 다이쿼리는 몇 가지의 다른 냄새들을 내리붓는다. 책에 실린 단편 「다이쿼리」에서는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다이쿼리를 만든다. “화이트 럼 더블 샷과 라임 쥬스, 그리고 자몽 반 개를 짜서 넣고, 설탕은 뺀다. 얼음 한 컵과 함께 블렌더에 갈아서 칵테일 잔에 따른 뒤 민트 잎으로 장식을 한다. 그러면 럼의 단내와 라임 주스의 상큼한 향, 자몽의 씁쓸한 향이 결합된다.” 다이쿼리 한 잔이 뒤섞어놓은 냄새들은 다시 이런 저런 소리들 속으로 섞여든다. “다이쿼리를 한 모금 마신다. 담배를 한 모금 머금고 내뿜는다. …… 담배 연기는 묘하고 낯선 춤을 춘다. 그 춤은 작게 들리는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 가령 빗소리, 가령 자동차 소리 등에 맞춰 추는 것 같다.”

다이쿼리의 향은 복잡해진다. 자몽과 라임, 럼, 담배, 우디, 삼목, 백단 ……. 위에서는 빠뜨렸지만 여기에는 위스키 맛도 섞여 있다. 그리고 다이쿼리는 더 복잡해진다. 작게 들리는 음악 소리며 주변 사람들의 말소리, 창밖의 빗소리며 자동차 소리들 같은 것 때문에. 그 “작게 들리는” 소리들 때문에 「다이쿼리」의 어두운 바는 복잡해진다.

「Daiquiri」의 전반부에서는, 아마도 녹음 시 마이크로 들어왔을 (그리고 보통의 경우라면 믹싱을 마쳤을 즈음엔 이미 제거되어 있을) 미미한 잡음들을 들을 수 있다. 잡음들이래도 사실 소리가 작기 때문에 그렇게 크게 거슬리는 소리들은 아니다. 보컬이 입을 떼기 직전이나, 입을 닫은 직후에 그 잡음을 가장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그럴 때면 보컬 트랙의 마이크 잡음이 갑자기 (다시) 들리기 시작하거나, 갑자기 (다시) 멎을 텐데, 알아채기 쉬운 이유는, 잡음이 덧붙었다 빠져나가는 게 굉장히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처음 순간은 재생시간이 18초에서 19초로 넘어가는 사이에 온다. 비단 후반부의 거친 기타와 드럼의 시끄러운 소리들에서만이 아니라, 그 때의 그 작은 소리들에서부터 「Daiquiri」는 지저분하다. “숨막히는 계단”과 “흘러가는 옥상”이 나오기 전부터 이 노래에서는 무언가 껄끄럽고 현기증 나는 것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위스키와 화이트 럼 한 잔에 섞여들면서 이 노래를 어지럽힌다. “작게 들리는” 소리들은 「Daiquiri」도 복잡하게 만든다.

 

종종 『유령의 집』은 더 강렬해진다. 그리고 가끔은 점진적으로 강렬해진다. 「Pop Up」에서 「987654321」을 지나 「Gun Shot!.」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그렇다. 일종의 경고처럼 생각될 것이다.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다는 그 덩어리는, 뒤에서 돌이켜본다면 「987654321」를 설명하는 술어처럼 생각될 것이다. 누군가 무언가를 말하지만 무엇이라 말하는지는 알 수 없고, 목소리 또한 그 주인을 알 수 없게끔 과격하게 변조되었다. 제 때를 놓치기 전에 음소거를 해야 한다는 뇌까림은, 「Gun Shot!.」에서 다시 돌이켜본다면, 일종의 경고처럼 생각될 것이다. 적당히 음량을 줄이지 않는다면, 「Gun Shot!.」은 몹시 시끄럽고 폭력적인 소리들을 갈겨댈 것이다. 「987654321」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편이기 때문에, 어쩌면 「Gun Shot!.」이 쏘아대는 소음들에 깜짝 놀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포티셰드의 「Machine Gun」과 소닉픽션의 「Gun Shot!.」이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생각한다. 두 곡 모두에서, 먼저 타악기 소리에서 시작하는 “탕탕!” 소리는 규칙적인 리듬 패턴을 가지고 있다. 「Machine Gun」의 경우 발포음의 리듬이 조금 더 단순하기 때문에, 조금 더 박력 있게 들린다. 그리고 다른 소리들, 이를테면 뒤로 가면서 번갈아 들리는 몇 가지 전자음들도 그 발포음의 리듬에 맞추어 발사되기 때문에, 노래가 말끔하게 정렬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Gun Shot!.」은 훨씬 난장판이다. 「Gun Shot!.」의 소음은 때때로 처음의 타악기 리듬 패턴을 무시하는 듯도 하며, 그래서 훨씬 격렬하게 들린다. 요컨대 소닉픽션의 총격전은 포티셰드의 것보다 훨씬 위험하게 느껴진다. 포티셰드의 전장에서도 총소리는 충분히 크고 위협적이지만, 거기에서 총성들은 서로 차례를 지켜가며 울렸다. 「Gun Shot!.」에는, 규칙적인 총성들 위로 더 빠르게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소음들이 있고, 그것들은 뒤로 갈수록 순서를 따지지 않는 듯하다.

더 사납거나 더 현란한, 또는 더 장렬한 소리들은 드문드문 우스운 장면들의 계기가 된다. 이를테면 「fire」에서 「신기루」까지의 긴장이 「Loop Spiderman’s Web」과 「Unboxing」에서 갑자기 이완되는 장면이 그렇다. 「fire」는 아마도 『유령의 집』에서 가장 무서운, 인더스트리얼 노이즈 트랙이다. 여러 번 들었지만 지금도 가끔 듣다가 놀라고 소름끼치고 그런다. 그리고 아마 그것은 『유령의 집』에서 가장 화려한 트랙이기도 할 것이다. 화려하다는 건 그 꺼림칙한 음색과 질감들에 대해서 쓴 말이기도 하지만, 몇 가지 요소들이 중심 없이 서로 덧붙어 있어서 듣고 난 다음에도 그것이 어떤 곡이었는지 요약적으로 기억하기 힘들다는 뜻에서 쓴 말이기도 하다. 「Gun Shot!.」이 화려해졌던 것도, 타악기 리듬을 축으로 삼아 쏟아지던 소음들이 그 리듬을 망가뜨리기 시작하던 때부터였다.

「fire」 뒤로 한동안 『유령의 집』은 분열적인 소리들을 들려준다. 「Deville」은 꽤나 빨리 지나가는 탓에 안 그래도 정신없는 노래가 더 정신없게 들린다. 얼결에 지나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금방 닥쳐오는 「Enter the Box of Lie」는 몇 가지 부분들을 얼기설기 묶어놓은 곡처럼 들린다. 쨍쨍한 신스를 잠깐 들려주는 첫 번째 부분이 있고, 앰비언트 풍의 두 번째 부분, 딜레이 걸린 타악기 리듬만 나오는 세 번째 부분이 있고, 세 번째 부분의 끝 부분에 겹쳐들며 관악기 비슷한 소리를 내는 네 번째 부분이 있으며, 그 뒤로는 여러 부분들이 한꺼번에 들리는 마무리가 길게 이어진다. 「Knee」와 「Dream Together」는 타악기 리듬들을 이어붙이거나 병렬시킨 곡인데, 「Knee」는 조금 더 여백이 많은 느낌을, 「Dream Together」는 타악기에 걸린 리버브와 갑자기 끼어드는 말소리와 박수 소리로 조금 더 꽉꽉 채워 넣었다는 느낌을 준다. 여하간 둘 다 정신 사납기는 마찬가지다. 「웃음음악」과 「신기루」에서는 광기 비슷한 것까지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Loop Spiderman’s Web」은 이 흐름을 탁 끊는다. 제목 그대로 한 가지 루프를 반복시키면서 진행되는 이 앰비언트 트랙은, 이 전의 흐름에 비하자면, 너무 진지하다. 그 난데없는 진지함이 도리어 우습다. 「Deville」에서 「신기루」 사이를 통과하고 감싸온 맥락이 광기어린 산만함과 현란함이었다면, 그 맥락과의 연관에서 생각해 볼 때 「Loop Spiderman’s Web」은 뜬금없는 곡이다. 녹음된 루프의 음색이 얌전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 노래는 훨씬 가지런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산만한 분위기가 갑작스레 가라앉는 장면은, 꽤 생뚱맞고 그렇기에 우습게 들린다. 이어서 「Unboxing」의 시작은 더욱 우습다. 「Unboxing」의 피아노는 난데없이 처연하다. 코드 진행도 너무 구슬프고 보컬 멜로디도 그렇다. 앞 곡의 가지런함과는 다른, 신파적인 질퍽함이 느껴지는 그런 피아노다. 앞서 여덟 곡 정도를 기억하면서 「Unboxing」의 도입부를 들으면, 눈물 참듯 꾹꾹 눌러 밟히는 피아노는 차라리 농담 같다.

「귀뚜라미 오백마리의 처절한 울음이 창문을 통해 내 귓가로 전달될 때」와 「빙빙」도 코미디 듀오다. 「귀뚜라미 오백마리의 처절한 울음이 창문을 통해 내 귓가로 전달될 때」는 무거운 트랙이다. 그 노래 한 가운데 뭉쳐있는 노이즈는 장렬하고 웅장하며 엄숙하다. 그 심각한 분위기의 노이즈 뒤로, 별안간 트랩 비트가 찍히는 것이다. 뜻밖에도, 랩도 본격적이다. 트렌드에 맞게 제 때 추임새를 넣어준다. 재미있는 것은 앞서의 숭엄했던 노이즈와 매캐한 트랩 비트 사이의 부조화다. 이런 식의 농담을 날리는 또 다른 코미디 듀오로는 「Tunnel Boring Machine」과 「일부터열까지」가 있다. 스산하고 장엄한 노이즈와, 그 뒤로 따라붙는 경쾌한 반주 사이의 부조화. 나는 그런 것이 재미있다.

「Unboxing」이나 「빙빙」은 어떤 노래 뒤에 듣든 재미있는 트랙들이다. 이 앨범 안의 곡들도 두 곡과 그리 썩 잘 어울리지는 않고, 따라서 트랙들을 무작위로 재생해도 두 곡은 충분히 생뚱맞은 차례에 놓일 것이다. 나는 『유령의 집』의 이런 농담 같은 장면들을 좋아한다.

 

B

 

1916년 취리히의 카바레 볼테르에서 트리스탄 차라는 몇 명의 사람들이 몇 가지 언어들로 쓰인 서로 다른 시를 동시에 낭송하는 무대를 기획했다. 관객들은 낭송자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을 텐데, 서로 다른 리듬을 가지고 내뱉어진 서로 다른 말들이 한꺼번에 들렸을 것이기 때문에, 그 말들 중 어느 하나를 따로 식별해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알려지기로는 대단히 소란스러웠다고 한다. 그렇게 낭송되는 목소리들의 뭉치를 일러 동시-시라고들 한다. 「신기루」에서 그와 비슷한 것을 들을 수 있다. 첫 50초 동안, 양쪽에서 서로 다른 문장들을 주절거리는 것을 들을 수 있다. 한 쪽 이야기는 악마가 복싱 금메달리스트라는 걸 추기경에게 알려주는 이야기이고, 다른 한 쪽의 이야기는 부동산업자들 때문에 조종석에 갇힌 파일럿을 응원하기가 힘들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둘이 서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는 썩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좌우 채널을 구분해서 출력할 수 있는 장치로 듣는다면, 좌우에서 지껄이는 말들이 서로 산만하게 얽혀 둘 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듣기 힘들 것이다. 그러면 그 두 목소리가 말하는 게 무슨 이야기들이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마 별 뜻 없는 소음으로만 들릴 것이다.

1916년 카바레 볼테르에서는, 어떤 의미 내용들을 생각하기 힘든, 단지 말해진 소리들의 산만한 연속으로서만 들리는 시들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일이 한창이었다. 휴고 발은 의미론적 연관이 없는 말들을 운율 없이 아무렇게나 발음하는 시 낭송 공연을 기획했다. 그것을 소리-시라고 이른다. 취리히 다다는 언어의 언어적 기능을 훼손하고, 말들에서 소리들만 남겨두는 것으로 시작했다. 다다는 지독했다. 아무것도 뜻할 수 없고, 아무것도 알려줄 수 없고, 아무것도 명령하거나 약속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질문할 수 없는 그 지경에까지 말을 몰아붙였다.

한 곡 더. 「밤이연주하는침묵이시끄러운소리를낸다」는 「신기루」와는 다른 전략을 취한다. 우선 음절들 사이의 간격을 길게 벌려놓는 것. 각각의 음절들은 한동안 느린 템포의 두 박자 리듬으로 뚝뚝 끊겨 발음되며, 한 문장이 다 말해지는 데에 약 19초가 걸린다. 몇 명의 사람들이 같은 문장을 되풀이해서 말할 텐데, 한 사람의 말이 끝나기 전에 다른 사람이 말을 시작할 때도 있고, 발화의 리듬이 조금씩 바뀔 때도 있으며, 말 중간에 이런저런 소음들이 (이를테면 이 노래에서는 드럼 비트도 소음이고, 사실 말들이 겹칠 때에는 말소리도 소음이다.) 끼어들기도 한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문장의 마지막 음절이 발음될 때쯤엔 첫 음절의 글자가 뭐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고, 듣다 보면, 소음 때문에, 이 사람들이 중간에 조금 다른 문장을 말했나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때 각 낱말들의 의미는 문장 안에서 종합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고, 말은 음향적 덩어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종의 소리-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곡의 제목을 보지 않고 듣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다다는 새롭게 제시된 미학적 관점이 아니었다. 다다는 새로운 방식의 이해를 요청하는 그런 예술이 아니었다. 다다는 예술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되고자 했다. 다다는 새로운 미학적 영역을 개척하기보다는, 미학을 부수고 찢고 없애버리려 하였다. 18세기 말부터 무시무시한 식탐으로 갖가지 과중한 술어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한 미학에 대한 짧고 격렬한 저항이 다다였다. 미학은 이론화 불가능한 것의 이론이었으나, 다다는 기성의 모든 이론적인 것들로부터의 일탈이었다. 다다이즘은 반-미학이었고, 다다 회화와 음악, 시, 조소는 반-예술이었다. “다다이즘은 그 모든 것을 총괄한 것이었고 동시에 그 반대이기도 했다. 즉, 반미술, 도발적인 문학, 장난조의 음악, 급진적인 정치 혹은 반의회주의, 그리고 때때론 그저 단순히 유치함 자체였다.”2 시였으나 시가 아니었고 음악이었으나 음악이 아니었기에,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다다이스트들은 모든 것이 다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예술사의 한 국면으로서 다다를 배운다. 예술사학과 미학은 금방 다다를 삼키고 소화했다. “다다이즘 예술”이라는 기이하고 모순적인 이름은 이제 무척이나 익숙한 이름이다. 그것은 다다의 실패다. 미학은 다다의 비대한 이름을 먹어치우고 더 거대해졌으며, 그로써 그 식탐도 끝을 모르게 되었다. 예술이 아닌 것도 예술이 되었고 미학의 대립항도 미학적인 것이 되었다.

음악도 언젠가부터 비슷한 식탐을 가지고 있었다. 음악에는, 음악적이지 않은 소리들까지 음악의 질료로 만들고, 소리가 아닌 것들까지 음악의 질료로 만들고, 일단 무엇이든 음악적인 것으로 만들고 보려는 영역 확장의 야심 같은 것이 있었다. 사실 그것은 매우 오래되었다. 아마 다다보다 오래됐을 것이다.

“밤이 연주하는 침묵이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 첫 곡의 표제는 곧바로 케이지를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케이지보다 오래된, 음악의 식탐을 생각하게 한다.

케이지에게 침묵이란, 연주자도 작곡가도 통제할 수 없는 소음이 무대화된 상태다. 달리 적자면 침묵은 무대에 오른 소음들의 새삼스럽고 소란스러운 지속이다. 소음들로서의 침묵, 또는 침묵을 채우는 소음들은, 연주자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대 밖에서부터 무대 위로 개입해온다. 침묵=소음은 데이비드 튜더가 피아노의 건반 뚜껑을 열고 닫음에 따라 무대에 오를 테지만, 그런 행위들과는 상관없이 지속해 왔을 것이며 또 지속해 갈 것이다.

소닉픽션은 밤이 침묵을 연주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실, 침묵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또는, 이제 이들은 산만하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자신들의 소음을 침묵이라고 부르겠다는 것이다. 목소리들 중에는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도 있고, 얇게 속삭이는 목소리도 있다. 그들은 대체로 누가 들을 새라 조심스럽게 말하지만, 그것은 아주 또렷하게 들린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의 말에 끼어들거나 할 때는, 그 말들이 시끄럽게까지 들린다. 그 말소리들이 크고 분명하게 들릴 수 있는 것은 물론 다른 것보다도 녹음이나 믹싱 과정에 빚진 바가 크겠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그것들을 덮을 만큼 큰 다른 소리가 (그것들과 동시에) 들리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또렷하게 들리는 것일 테다. 중얼거리는, 또는 속삭이는 소리들이 또렷하게 들린다면, 그 까닭은 그 주변이 조용하기 때문이다. 달리 적자면, 이 트랙의 드럼과 전자음이 말소리들을 덮어버릴 만큼 큰 소리를 내지는 않기 때문이다. 주변이 조용하지 않다면 속삭임은 들리지 않는다. 이 문장을 뒤집을 때에 우리는 케이지에 닿는다. 주변이 조용할 때에도, 속삭임은 들린다. 침묵을 연주한다는 것, 그것은 밤이 비음악적인 것을 음악적인 것으로 뒤집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밤은, 그 안에서는 무엇이 음악적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구분할 수 없는 어둠이다. 그것은 식별불가능성의 시간이다. 케이지는 끝이 없는 것 같이 보이는 영역의 가능성을, 또는 그러한 영역으로의 확장 가능성을 제시했다. 튜더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그 시간 동안 무대에 오른 모든 것이 음악의 질료다.

케이지가 이해했던 것은, 소리들이 모두 멎는 때는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침묵이 소리가 사라진 상태를 뜻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실제로 침묵을 구현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3 그리고 침묵에 대해 케이지는 또 하나의 신중함을 드러낸다. 침묵이 모종의 의도에 의해 유용성을 가지게 될 때, 곧 침묵이 (가령 클라이맥스와 대조되는 휴지점으로서) 구성이나 표현 등을 목적으로 곡의 구조 안의 계기로 자리 잡을 때, 그 때의 그런 소음은 주변음으로서의 소음은 아니다.4 만약 부분이라는 관념이 질서지어진 부분들의 결합으로서의 전체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곡의 부분이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차라리 파편이다. 소음으로서의 침묵은 우연한 것이어야 한다. 관객을 일단 그것을 듣기 전에는 그 침묵 속에서 무엇을 듣게 될지에 대해 미리 알고 있는 바가 없어야 한다. 연주자도 작곡가도 무엇이 들릴지 몰라야 한다. 그것은 불청객이어야 한다. 연주 중에 불청객이 들어올 것이라는 것쯤이야 연주자도 작곡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올지는 모른다. 무슨 소리가 될지 모른다는 점에서 침묵=소음은 불청객이다. 불청객이 누가 될지는 우연에 맡겨두는 것이다.

그러니 「밤이연주하는침묵이시끄러운소리를낸다」에 녹음된 어떤 소리도 케이지가 생각한 그런 소음은 아닐 것이다. 그 소리들은 모두 주변적이라기보다는, 중심적인 것으로서 승인된 소리들이라고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이 앨범 크레딧에도 엔지니어들의 명단이 있다. 엔지니어링은 녹음된 소리들을 다시 확인하고, 선별하고, 조정하고, 재배열하는 절차다. 달리 적자면 그것은, 결과물을 재생할 때 무엇이 들릴지를 승인하거나 거부하는 절차다. 엔지니어링에서도 엔지니어의 의도를 제거하고 우연성을 확대시키는 방식들이 있기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내가 스트리밍을 돌릴 때 듣게 되는 소리들은 그들에 의해 승인된 소리들이다. 하나의 곡이라는 정해진 형태의 부분이 된 소리들인 것이다. 재생 기기나 오디오 등의 조건을 맞춘다면, 다음번에 그 음원을 스트리밍 할 때에도 「밤이연주하는침묵이시끄러운소리를낸다」는 똑같은 소리들을 송출할 것이다. 그것들은 이를테면 약속된 소리들이다. 이번에도 다음번에도 똑같은 것을 들려줄 것이라고, 그렇게 약속된 소리들이다. 그러니 그것들은 우연한 소리들이 아니다.

우연한 것들은 레코드 바깥에 있다. 가령 내 이어폰이 난데없이 고장이 나는 바람에 내가 바라지 않았던 이상한 소리가 나온다고 하면, 그 소리는 우연하다. 내가 이 노래를 듣다가 갑자기 내 옆에 있는 누군가가 크게 고함을 쳤고, 그래서 내가 이 노래와 함께 그 사람의 고함소리를 듣는다고 하면, 그 소리는 우연하다. 내가 가령 카페 같은 곳에서 이어폰을 끼고 이 노래를 들을 때, 하필이면 그 때 카페 직원이 가게에서 흘러나오던 노래의 음량을 키웠으며, 그래서 내가 내 이어폰에서 나오는 노래랑 카페 천장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를 같이 듣게 되었고, 그때 나오던 노래는 주요 음원차트 상위권에 있는 노래들 중에서 무작위로 선택된 노래였다고 한다면, 그 노래는 우연하다. 아니면 내가 노래를 듣던 중 갑자기 재생 기기의 전원이 꺼지고, 내가 노래를 듣고 있어야 할 때에 주변에서 나는 다른 소리를 듣게 된다면, 그 소리는 우연하다. 그것들은 내가 이 노래를 듣는 중에, 별안간 이 노래와 함께 듣게 된 불청객이다. 그 소리들은 이 노래에 개입했다. 그러나 내가 개입시킨 것도 아니고 이 노래가 개입시킨 것도 아니다.

그 소리들이라면 침묵이 소리를 낸다는 술어의 역설에도 걸맞을 것이다. 그것들은 「밤이연주하는침묵이시끄러운소리를낸다」에 대해서 침묵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밤이연주하는침묵이시끄러운소리를낸다」에 녹음된 소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노래가 들려주는 소리들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노래에 대해 침묵이라고 불릴 만하다. 그 침묵 가운데에서, 이 노래가 아닌 어딘가의 무언가가 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므로 침묵은 소리를 낸다.

그리고 만약 침묵이 내는 시끄러운 소리가 이 노래의 내용이라면, 이 노래의 제목이 요구하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이 노래에 대해 이 노래의 내용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이 노래의 영역은 식별불가능성의 무한한 밤이다. 침묵=소음은 개입했다. 그것은 분명 우연한 것이다. 이 레코드가 약속한 소리도 아니다. 그 누구도 그 소리들이 개입할 것을 미리 계획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노래의 제목은, 그렇게 난데없이 개입한 소리들까지, 이 노래의 내용으로 만든다. 이 노래의 제목은 뜻하지 않게 노래에 박혀든 파편까지 노래의 질료로 만들어버린다. 이 노래에 대해서는 바깥도 안도 없다. 왜냐하면 녹음되지 않은 소리들까지 이 노래의 부분이 될 것이고, 이 노래의 외부가 이 노래의 내부로 들어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노래가 가지고 있는 욕심은 정말이지 대단한 것이다. 케이지가 생각했을 법한 제목을 다다의 것에 붙여버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제목은 훨씬 더 막무가내다. 그것은 자신과 다른 것 사이의 구별을 지우고, 자신이 아닌 것들까지 자신으로 만들어버리려 한다. 이윽고 모든 것이 될 「밤이연주하는침묵이시끄러운소리를낸다」.

그렇다면 누가 이 노래를 연주하는가? 식별불가능성의 밤이다. 밤이 연주한다. 요컨대 우리는 누가 이 노래의 연주자인지를 분간할 수 없다. 내 이어폰이 고장 나서 난 소리가 이 노래에 개입했다면, 내 이어폰이 연주했던 것이다. 내가 이 노래를 듣다가 남의 고함소리를 들었다면, 고함 친 사람이 연주한 것이다. 내가 이 노래를 듣다가 카페 노랫소리를 들었다면, 카페 직원이 연주했던 것이다. 내가 이 노래를 듣다가 갑자기 재생 기기가 꺼졌다면, 일단 그 기기가 연주했던 것이고, 그 때 내가 듣게 될 소리들을 냈을 모든 것들이 연주했던 것이다.

 

쾅 프로그램은 “수많은 일들이 동시에 일어난다”며 거듭 뇌까리는 노래를 만들고는 그 노래에 「서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직선적인 비트 위로 직선적인 리프를 후려쳐대는 노래였다. 기타와 드럼, 노트북에서 재생되는 베이스와 그 밖의 다른 트랙들을 더해도, “동시에” 들리는 요소들의 가짓수가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지지는 않는 노래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수많다고 할 텐가.

서울에서는 분명 수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그곳도 동시에. 그러나 그 많은 일들이 벌어질 때 나는 소리들 각각을 전부 동시에 들을 수는 없다. 기타를 치고, 드럼을 치고, 맥북으로 다른 트랙들을 재생하는 등의 일들은 모두 한 자리에서 셀 수 있는 일들이다. 그 일들에 수반하는 소리들도 셀 수 있는 소리들이다. 그러나 서울에선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셀 수 없이 많은 소리들이 날 것이다.

공연장의 연주를 들으면서는 들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기타와 드럼이 내갈기는 소음 때문에 묻혔든, 공연장의 벽에 막혔든, 아니면 그저 멀리에서 난 일이라 닿을 수 없었든, 연주중에는 들리지 않는 무언가는 당연히, 그리고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서울」의 노랫말은 연주중에는 들리지 않는 그 무수한 것들을 노래에 집어넣음으로써 노래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수많은 일들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그토록 시끄러운 소리들을 듣는 와중에도 들리지 않는 소리들을 상상하라고 요구한다.

2015 년 상상마당에서 열린 <레이블 마켓> 쇼케이스에서 쾅 프로그램이 「서울」을 연주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날 최태현은 앰프를 밟고 뛰었고 권용만은 심벌을 깼다. 눈을 돌리기 힘든 스펙타클이었다. 그런데 “수많은 일들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그 요란한 광경을 눈앞에 두고도 공연장 바깥의 소리들을 상상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령의 집』에는 「Seoul Map」이 있다. 물론 「Seoul Map」은 「서울」과는 전혀 다른 노래다. 「서울」과 비교하자면 「Seoul Map」의 오르간 멜로디는 울적하다. 그것에서는 쓸쓸한 향수가 감돈다.

추레했던 장소들을 깡그리 헐어버리고 난 뒤 서울에는 파라다이스가 들어섰다. 이제는 서울에서 밀려난, 아무 곳에도 없는 장소들, 이제 이 도시 안에 없는 사람들, 사라진 기억들, 그것들을 지도 안에서 본다. 심지어는 그것들이 지도 안에서 움직이고, 지도 안에서 사는 것을 본다.

『유령의 집』 41쪽에서 42쪽 사이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다소 길지만 인용한다.

도시 곳곳은 재개발이 한창 진행중이었고, 지나온 공간에 대한 기억 역시 재개발과 같이 떠밀려 나가 유령화되었다. …… 과거의 지옥은 깨끗하게 헐리고 지워진 채 도심의 파라다이스로 환히 비춰지리라.
…… 서울의 공간들이 그리울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인터넷의 지도 서비스를 통해 그 시절의 흔적을 찾아보곤 한다. 이 세계에 남아 있지 않은 과거의 공간을 온라인에서 보고 있자면 기묘한 향수와 상실감을 불러일으킨다. …… 돌아갈 집을 상실한 이에게 이 가상의 이미지는 유일하게 고향을 방문할 수 있는 유령화된 거주지로 남았다.

「서울」이 공연장 바깥 다른 공간에서 나고 있기 때문에 들리지 않는 소리들을 들을 것을 요구했다면, 「Seoul Map」은 이제는 이 도시에서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소리들을 들으라고 요구한다. 어디서도 그것들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들은 이제는 없는 장소에서 나던 소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들을 것. 마치 유령을 부르듯, 더는 나지 않는 소리들을 이곳에서 다시 들을 것. 「Seoul Map」은 동시성에 대해 다시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사라진 과거가 됐기에 이제는 “동시에” 듣는 것이 불가능한 소리들을, 이 노래를 듣는 “동시에” 들을 것. 「Seoul Map」의 요구는 기이하다. 이제 일어나지 않을, 이제는 결코 현행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그 수많은 일들의 소리들을, 이 노래를 듣는 바로 그 때에 (청취하지 않으면서) 청취할 것. 동시에 들릴 수 없는 것들을 동시에 들을 수 있도록 할 것. 문제는 기억이다. 기억들을 듣는 것이다. 기억 속의 일들을 서울 지도 안에서 다시 일어나게 할 것.

소닉픽션, 이한범은 다음과 같이 픽션을 이해한다.

두 가지 정도의 의미로 픽션이란 용어를 썼던 것 같아요. 하나는 서울의 리얼리티는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픽션이에요. 실재를 구성하는 강한 힘을 발휘하지만, 비가시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가리키기 위해 픽션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어요. 픽션 하면 비현실적인 공상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데, 저희에게 픽션은 오히려 더 정확한 현재의 현실과 관련되어 있는 거죠.
두 번째 의미는 비가시적인 무언가를 드러내는 방법으로서의 픽션이에요. 장르 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유령의 집’을 보면 유령의 존재가 소리를 통해서 드러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처럼 영화가 유령을 보여주는 방식이 저희가 처음부터 매혹되었던, 이 프로젝트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방법이에요. 실체 없는 유령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픽션. 이게 우리가 하려고 했던 거고요. 픽션을 드러내기 위해 픽션을 만든다.

비가시적인 것, 또는 이 노래에서 픽션으로 쓰이는 것. 그것은 오늘의 서울에는 어울리지 않는, 지금 들릴 일 없는 소리들이고, 실제로 지금은 들리지 않는 소리들인데, 들어야 하는 것이다. 들을 수 없는데 듣는 소리들이다. 그것은 레코드에 담겨 있지 않으나, 레코드가 재생될 때, 그 레코드의 청취에 개입해야만 소리라는 점에서 소음이다. 기억으로서의 소음이다. 듣지 않고 있는 것들을, 그것들을 듣지 않고 있는 바로 그 와중에 들을 것.

그러므로 나는 「Seoul Map」에서부터 시작해 유령의 집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것이다. 그곳은 들리지 않는 것들, 결코 들을 수 없는 것들, 이미 사라지고 없어진 것들이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는 곳이다. 더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그런 것들을 보고 듣게 되는 곳이다.

「Seoul Map」은 자신 안에 녹음되지 않은, 녹음이 시작되기 전 이미 사라진 것들을 들으라고 요구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유령의 집은 『유령의 집』과는 다른 장소여야만 한다. 『유령의 집』이 있을 그 자리에는 없으나, 유령의 집을 찾기 위해 펼친 지도에서 얼핏 스쳐가듯 보이는 그런 (비)장소여야만 한다. 그것이 위치해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는 다시 그 자리를 떠돌아다니는 그런 장소여야만 한다.

그러니 『유령의 집』의 소음-기억을 레코드에서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겠다.

「Seoul Map」의 요구는, 분명히, 음악에 대한 요구가 아니다.

그것은 건물이 헐릴 때 같이 사라지고 내쫓긴 것들에 대한 요구다. 『유령의 집』에 실린 「장소상실」은 몇 가지 기억들을 다시 서술한다. 레코드가 무엇을 들려주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레코딩이 시작되기 전, 도시 곳곳에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를 돌이키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 다시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Seoul Map」의 요구에 충실할 때, 레코드는 레코드 바깥의 기억을 보존하고 재생시키기 위해 재생되어야 하는 것이다.

건물을 헐고 사람을 내쫓는 일은, 매번 고유한 폭력성을 가지고 실행된다. 그것은 지금도 되풀이되지만, 그때마다 어떤 것들을 영구히 훼손하고, 어떤 것들을 돌이킬 수 없게 파괴한다. 사라진 것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 폭력들을 기억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억한다면, 그것은 매번 다른 사건들로서 지금도 새로이 되풀이되고 있는 그 폭력들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겠다. 우리에게는 이미 많은 기억들이 있으며, 현행적인 폭력들을 목격하고 있다. 개포동에서 을지로까지 가까운 사례들이 있고, 그 사례들은 동인동 등 서울의 바깥에까지 이른다.

내게 중요한 것은 「Seoul Map」의 요구를 「밤이연주하는침묵이시끄러운소리를낸다」의 식탐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인 듯 보인다. 장소들이, 그곳에서의 삶들이, 그곳에서 났던 소리들이 상실될 때의 그 폭력성과 고통을, 「Seoul Map」 안에 집어삼켜진 내용으로만 사고한다면 그것은 교만일 것이다. 그것은 「Seoul Map」이 재생될 때 동시에 기억될 수는 있겠지만, 「Seoul Map」의 내부로 빨려 들어가 수축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요구는 레코드에서부터 레코드 바깥으로 향해야 한다. 문제가 제기되는 수준은 레코드나 음악의 내부여서는 안 된다. 문제가 제기되어야 하는 그 곳에서는, 차라리 레코드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도 말해야 할 것이다. 「Seoul Map」의 요구는 「Seoul Map」에서 벗어나야 하고, 서울과 여러 다른 도시들의 사라졌거나 사라져가고 있는 장소들로 뻗어가야 한다.

사라진 장소들에 대한 기억은 물론 「Seoul Map」에 개입한다. 그 무엇보다도 『유령의 집』 스스로가 그러한 개입을 요청하는 듯 보인다. 그 기억들을 『유령의 집』 안의 내용으로서만 다루게 된다면, 그것은 지독한 (그리고 지긋지긋한) 무례일 것이다. 음악에 개입한 것들을, 다시, 신중하게, 음악으로부터 독립시킬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1. 럼을 베이스로 한, 칵테일의 한 종류.
  2. D. 엘거, 다다이즘, 김금미 역, 마로니에북스, 2008, 6쪽.
  3. J. 케이지, 사일런스, 나현영 역, 오픈하우스, 2014, 8쪽.
  4. 같은 책,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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