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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 『YR-TV』

1.

유별난 앨범이다. 길이부터 그렇다. 수록된 곡들은 꽤 많은 데 비해 재생시간은 퍽 짧다. 열네 곡 중 절반은 15초 안에 끝난다. 나머지 절반도 길이가 길진 않다. 앨범을 다 돌려도 20분을 넘기 전에 다 들을 수 있다. 또 이 앨범은 고집스러우리만큼 산만하다는 점에서도 유별나다. 서로 다른 소리들과 분위기들이 짧은 간격으로 번갈아 나타나는데, 길이가 조금 긴 곡들도 대개는 한 가지 분위기를 오래 끌고 가지 않기 때문이다. 소리들은 불쑥 튀어나왔다가 재빠르게 사라진다. 여러 장의 사진들을 빠르게 훑어보다보면, 방금 전 봤던 사진들이 잘 기억나지 않게 되는 때가 오곤 한다. 『YR-TV』의 경우에도 그렇다. 「Ch05」를 들을 때쯤이면 첫 곡의 전개가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 「Ch10」을 들을 때쯤이면 「Ch05」도 잘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 음색들이 현란하고 가끔씩은 리듬도 다소 복잡해지기에 앨범은 더더욱 정신없게 들린다. 이토록이나 빈틈없이 산만한 앨범은 흔치 않다. 산만함은 이 앨범의 거의 모든 국면들과 계기들의 목적인 듯 들린다. 곧 『YR-TV』에서 산만함은 앨범 전체를 질서 짓는 총체성인 듯하다. 이런 점에서 『YR-TV』는 엄격하리만큼 일관적이고 자기동일적인 앨범일 것이다.

왜 이렇게 요란해야 했는지, 유래는 준비된 답을 내놓는다.

TV를 보다 어느 시점부터 멍을 때리게 되었는지 기억이 안 날 때가 있다. 짧게는 몇 분에서 몇 시간까지 이어지는 이런 현상이 재밌었다. 자극적인 매체를 앞에 두고도 ‘무의 태도’를 유지하는 건 어쩐지 명상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TV를 보는 그러한 경험을 음악으로 구현 해봤다. 부디 아무 생각 없이 TV를 보듯 이번 앨범을 즐겨줬으면 한다.

팁: 앨범 반복 재생 + 랜덤 재생(임의 재생/셔플 재생)으로 해놓고 듣는 것을 권장

유래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써놓았지만, 팁이라기보다는 부탁으로 다가오는 이 라이너노트를 독해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라이너노트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작품으로서의 앨범과 그에 대한 감상이라는 오래된 범주들에 대한 비웃음이다. 라이너노트는 음악을 듣는 동시에 기억 속에서 휘발시켜버릴 것을, 그리고 앨범을 구성하는 트랙들의 순서를 무효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유래의 요구는 오늘날 음악 청취 경험의 일부를 조건 짓는 기술적 수단들을 경유한다. 무작위로, 그리고 무한정 반복될 수 있게끔 들을 것. 『Yr-TV』에 고유한 산만함을 셔플 재생과 반복 재생이라는 두 가지 조작을 통해 증폭시키고, 그 산만함이 지루함으로 뒤바뀌는 순간까지 밀어붙임으로써, 유래는 음악 작품들을 둘러싼 고전적 관념들을 비웃는다.

음악을 감상하는 시간은 (또는 예술작품에 대한 경험 일반은) 일상적 경험의 질서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 특별한 시간으로 표상되곤 한다. 여느 때와는 달리 신나서 춤을 추거나, 갑작스레 추억에 잠겨 들거나, 문득 슬퍼지거나, 때때로 전율하거나, 남모르게 위로받거나, 여러 가지 정념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다른 이와 공유하고 있다고 느끼거나……. 반면 유래의 라이너노트는 그런 독특한 경험들을 겨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앨범의 기획은 음악에 대한 주의를 지워버려 음악을 흘려듣게끔 만드는 것, 음악의 청취를 산만하면서도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소음들 듣는 일과 별다를 바 없는 일로 만들어버리는 것인 듯하다. 유래의 텔레비전은 감상을 방해함으로써 음악 청취의 특별함을 비웃는다. 청자는 앨범을 감상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청자는 음악에 대해 무관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 ‘무관심성’은 지극히 일상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라이너노트에 적힌 그대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듣도록 유도하는 것이 유래가 의도한 무관심성일 것이다. 청자는 정말이지 음악을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것이기에 그것에 대해 무언가를 판정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음악이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두거나 집중을 할 수 있게 해주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보통 TV를 틀어놓고 보면서 그 앞에 앉아 공부를 하지는 않듯이, 이 앨범도 다른 일을 할 여유는 주지 않는다. 그러기엔 이 앨범이 너무 정신사납다. 유래의 텔레비전은 청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게끔 만든다.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 없이 그저 앉아서 멍하니 시간만 흘려보내게끔 만들려는 것이다. “멍하게, 더 멍하게!” 그것이 이 유래의 팁에서 귀결되는 표어다. 음악을 귀 기울여 듣기보단, 그저 음악이 들리도록 놔둘 것. 이 어지러운 소리들을 단지 흘려듣게 만들 것.

작품, 그것은 무거운 낱말이다. “작품”이 말해지거나 적힐 때면 거의 언제나 정체모를 진지한 분위기가 감도는 듯하다. 또 그 낱말은 때때로 경외심을 수반하면서 발음되는데, 그럴 때마다 “작품” 앞에는 “위대한” 등 더더욱 무거운 낱말들이 따라붙는 듯하다. 가장 자주 거론되는 예는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일 것이다. 그 앨범의 첫 곡과 두 번째 곡은 서로 이어져있다.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만 홀로 떨어뜨려놓고 듣는다면, 그 곡의 인트로는 다소 뜬금없다. 매끄럽게 듣고자 한다면 첫 곡에서 다음 곡으로 넘어가며 들어야 한다. 재생 순서가 정해져있는 것이다. 앨범은 그것의 구성요소들인 각 트랙들의 순서를 매기면서 작품이 되었다. 작품에 대한 감상으로서 앨범의 청취는 그 순서를 따라가면서 진행된다. 감상은 작품 속 미적 속성들을 발견하고 음미하며 나아가서는 평가하는 작업일 텐데, 이 작업은 높은 수준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가령 『Sgt. Pepper』는 가장 유명한 콘셉트 앨범 중 하나다. 그 앨범에는 곡들을 지배하는 하나의 개념이 있다고 하며, 충만한 감상을 위해 감상자는 앨범 속에서 그 개념을 찾아내고 그 개념이 곡들을 질서 짓는 방식을 알아낼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자면 첫 곡부터 끝 곡까지 필요한 만큼의 주의를 기울여 들어야만 할 것이다. 작품 감상에 고유한 독특성이 그 집중 속에서 구성된다. 이 경우에서 순서, 작품, 감상, 그리고 집중은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 될 것이다.

유래는 그 조건들을 하나하나 허물어낸다. 셔플 재생을 권장했을 때 그는 순서에 따르는 청취를 포기하라고 요청한 것이다.1 반복 재생을 권장했을 때, 그는 앨범의 청취가 지루해질 때까지 이 앨범을 재생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같은 곡들을 계속 듣다보면, 결국 듣는 일이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듣는 일이 지루해지면 듣는 일에 집중할 수 없게 된다. 들리는 소리들이 산만하면 산만할수록, 순서 없이 뒤죽박죽으로 들릴수록, 집중은 더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니 유래는 『YR-TV』에 대한 집중을 포기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집중의 불가능성은 곧 감상의 불가능성이 될 것이다.

작품을 감상하는 미적 체험의 고유한 성격이 작품에 대한 감상자의 집중 또는 몰입에 수반된다는 관념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예컨대 아도르노는 “감상자의 몰입을 통해 작품에 내재하는 과정적 성격이 해방된다”고 쓰고, 뒤이어는 “예술 작품의 과정적 성격은 그것의 시간적 핵심”이라고 쓴다.2 “한 작품의 내재적 시간성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시간 속에서 전개되고 이러한 관계가 시간에 의해 해체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부분 및 전체에서 다 같이 나타난다.”3 작품을 그 내부에서부터 전개시키는 독특한 시간성은, 작품에 몰입할 때의 시간을 다른 일상적 경험들의 시간에서부터 질적으로 변화시킨다.

 

그래서 예를 들어 음악에 있어서의 시간은 그 자체로서 확실하지만 경험적 시간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하여 음악을 집중하여 듣게 되면 음악적 연속체의 외부에 있는 시간적인 사건들은 이 음악적 연속체의 외부에 머물며 이와는 별 관계가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 경험적 시간은 그 이질성으로 인해 음악적 시간을 방해하게 되며 양자가 서로 일치하는 경우는 없다.4

 

미적 체험의 시간이 다른 경험들에서의 시간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입장은 상당히 오래된 것이다. 고전 미학에서 미적 대상들 혹은 작품은 모종의 특별한 경험 (또는 비-경험)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시간성의 계기로 이해된다.5 그러나 유래의 글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시위를 겨눈다. 유래는 『YR-TV』를 듣는 이가 이 앨범을 관조하거나 반성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유래는 청자에게 앨범에 대한 주의를 전면적으로 철회할 것을 권장한다. 이제 청자는 감상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감상을 하지 않을 테니까. 재생되는 음악에 대해 신경조차 쓰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청자에게 앨범은 예술 작품 같은 특별한 성질의 것이 아닐 테다. 또는 이 앨범에서 작품은 더 이상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닐 테다. 왜냐하면 앨범을 재생하여 청취하는 경험이 그저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내는 다른 따분한 경험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테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 스쳐간 사람들을 일일이 기억하지 않듯, 버스 차창 밖으로 바라본 풍경을 자세히 기억하지 않듯, 『YR-TV』의 내용들 또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이 앨범을 청취하는 시간은 그저 길을 걷거나 버스를 타는 시간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저 다른 지루한 시간들과 똑같이 평범하게 지루한 시간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 라이너노트를 통해 겨냥된 유래의 실험은, 실험성에 대한 경험을 평범하게 만들어버리는, 즉 실험적인 소리들의 재현을 통해 음악적 실험성 자체의 지위를 가라앉혀버리는 일종의 패러디일 것이다. 그것이 유래의 라이너노트에서 독해할 수 있는 도발성이며, 역설적인 급진성이다. 집중 받지도 감상되지도 않을 『YR-TV』는 (고전적인 의미의) 작품이기를 스스로 포기할 것이다. 그렇다면 유래는 더 이상 작품으로 생각되지 않을 작품을 들려주고자 뜻한 셈일 테다. 유래의 글은 비-작품에 대한 관념을, 또는 작품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요청한다.

유래는 아도르노가 ‘청취의 퇴보’라는 어휘로 지시했던 것이 (아도르노가 이 어휘에 얽어놓았던 정치경제학적/사회학적 비판의 맥락에서부터 이 어휘만을 잘라내는 한에서) 『YR-TV』를 재생하는 이들의 귀에서 극단적으로 구현되기를 바란 듯하다. 아도르노는 퇴보한 청취가 “유아적인 단계에 억류된” 청취라고 쓰는데, 이 경우 음악의 청취자들은 “[소리들을] 원자적으로 청취하며, 그들이 청취하는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킨다.”6 유래는 아주 노골적으로 이런 방식의 청취를 요구하지 않는가? 유래는 『YR-TV』가 듣는 이의 집중을 분산시키기를, 그리고 아무것에도 집중하지 않는 감상자가 음악으로부터 분리되기를 요구하지 않는가? 유래는 『YR-TV』의 산만함이 청취자가 음악과의 밀착을 포기하게 되는 지점에까지 이르도록 의도한 것 아닌가? 그 지점에서 청취자는 『YR-TV』의 내용들을 듣는 즉시 잊어버릴 것이다. “[집중의] 분산은 잊어버리기를 준비하는 지각적 활동성이다.”7 재생한 음원을 멍하니 흘려듣기만 하는 활동은 곧이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수동성의 계기가 된다. 그것이 그저 채널 돌리듯이 음악을 듣는 청취방식일 것이다. 유래가 권장하는 대로라면, 앨범은 뒤죽박죽으로 결정된 차례에 맞춰 끝없이 반복될 테지만, 청취자는 앨범을 틀어놓기만 할 뿐 그 중 어떤 트랙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퇴보적이라고 낙인 찍혔던 것을 천연덕스럽게 앞으로 내세우면서, 유래는 고전 미학과 비평 담론의 전통을 비웃는다.

 

2.

유래의 라이너노트가 마치 권유하는 척 설명하는 기획은 글만 놓고 봐도 꽤 흥미롭다. 흥미로울 뿐 아니라 생각해볼 만한 것들도 많다. 하지만 ‘멍 때리면서 들으라’는 유래의 지침은 자칫 『YR-TV』의 가장 재미있는 구석을 놓쳐버리게 할 수도 있다. 라이너노트를 위해 앨범의 세부를 무시하는 것은 부당한 일일 것이다. 나는 아래에 유래의 글이 발을 헛디딜 때 『YR-TV』 스스로가 들려줄 수 있는 한 가지 특기사항에 대해 서술할 것이다. 이는 유래의 권고를 따르는 것이 어쩌면 『YR-TV』에서 찾아낼 수 있는 더 많은 것들을 묵살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그 사례는 「Ch13」과 「Ch14」 사이에서 구해진다.

***

「Ch03」는 오싹하다고 할 수 있을 음향들과 함께 출발할 것이다. 전자음이 안개처럼 깔려 들어온다. 작지만 바쁘게 울리는 글리치 노이즈들이 매캐한 분위기를 만든다. 「Ch03」의 음향은 빠르게, 그러나 너무 급하지는 않게 끝을 맞을 것이고, 『YR-TV』는 지체 없이 이 트랙을 지나칠 것이다.

곧, 또는 얼마쯤 뒤, 비슷한 분위기의 앰비언스가 「Ch09」에서 다시 울린다. 「Ch03」과의 차이는 시작 부분에서 글리치가 빠지고 물소리가 더해졌다는 점에 있다. 이내 사람 말소리가 들린다. 그 경박한 말소리가 그치면 작은 타악기 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리며 미약한 비트를 만들 것이다. 그 즈음 파도소리가 들리고, 그 뒤로는 「Ch03」에서보다 더 커진 글리치가 다른 소리들을 둘러쌀 것이다. 1분 53초, 갑작스레 두꺼운 베이스가 들어온다. 베이스는 잠시 끊겼다 다시 나와 물소리를 물리치고 곡의 하중을 떠받든다. 강해지는 비트와 함께 곡은 당장에라도 댄스 트랙이 되려는 듯한 제스쳐를 취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다. 베이스와 비트가 만들던 리듬은 기운을 잃고 없어진다. 조금만 기다리면 사라졌던 물소리가 다시 들릴 것이고,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화로워진다. 그리고 곡이 끝나기 바로 직전엔, 또 분위기가 급작스럽게 어수선해지고, 사람 말소리가 들린다.

『YR-TV』에서 반복의 기미를 알아채기는 어렵지 않다. 「Ch03」와 「Ch09」의 도입부가 비슷한 앰비언스를 들려주었던 것, 또는 「Ch09」에서 물소리나 말소리가 두 번씩 등장했던 것이 반복의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곡 안에서 반복의 형식이 가장 또렷하게 잡히는 예는 「Ch12」다. 이 곡은 간단한 리프의 단순한 반복으로 나아간다. 리프는 변형 없이 반복되다 끝이 오기 바로 전 차례에 딱 한 노트를 떨군다. 마치 틀린 음 마냥 축 쳐진 채 짧게 울리는 그 노트가 「Ch12」 안의 유일한 변화다. 그것은 재빨리 지나쳐가는 만큼 아주 옅은 불안감을 더한다. 그 뒤 리프는 곧바로 이전과 똑같이 복구되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반복된다. 그것으로 곡은 끝난다.

그리고 완전히 똑같은 소리가 단지 트랙 이름만 바뀐 채 반복되는 경우도 있다. 바로 이 경우에서 반복성은 극단적인 의미를 얻게 된다. 「Ch13」과 「Ch14」에서 들을 수 있는 내용은 동일하다. 단지 같은 소리-내용에 대해 기입된 글자들에만, 그것도 마지막 자리에 기입된 숫자들에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서로 같은 내용을 가지고서 구분되는 그 두 트랙들은 연달아 듣게 될 수도 있고, 셔플 재생으로 설정해둔 경우에는 몇 초나 몇 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떨어뜨린 채 듣게 될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만약 곡의 이름들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그 두 트랙들은 어떻게 서로 구분될 수 있는가? 동일한 곡이 두 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소리가 서로 다른 두 곡에 걸쳐 반복되는 것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두 곡 사이의 차이는 각 곡 앞뒤에 놓인 소리들에 의존해서 알려진다. 같은 내용을 가졌다 하더라도 두 곡은 서로 다른 맥락에 놓여있다. 번호 순서대로 들을 경우, 두 곡 사이에선 신호음이 들릴 것이다. 『YR-TV』에서는 곡들이 넘어갈 때마다 채널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곡이 시작할 땐 “딸깍, 찰칵”하는 소리가, 끝날 땐 “띠이이”하는 소리가 들린다. 두 곡은 이 신호음을 사이에 두고 갈라질 것이다. 「Ch13」은 「Ch12」의 리프 뒤에 울리는 그 신호음과 함께 시작할 것이고, 다시 신호음이 들린 뒤에 「Ch14」가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Ch14」 뒤엔 「Ch15」의 부드러운 신스음이 들릴 것이다. 「Ch13」 앞뒤에 들리는 소리, 그리고 「Ch14」 앞뒤에 들리는 소리는 서로 다르다. 같은 소리라 하더라도 처해있는 상황 또는 맥락은 다르다. 맥락의 차이는 동일한 소리를 서로 다른 두 곡으로 갈라놓는다.

「Ch13」과 「Ch14」에서 똑같이 반복되는 소리들을 둘로 가를 수 있게 해주는 특징은, 트랙들 저마다의 독립적 정체성이 아니라, 재생순서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게 규정되는 앞뒤 트랙들과의 관계다. 그것은 트랙들을 구분시켜줄 만한 그 어떤 내적 특징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찾아낼 수 있었던 비-특징의 특징이다.

그리고 그 특징은 청자가 어떤 트랙 앞뒤에 어떤 소리들이 들렸는가를 기억할 수 있을 정도의 주의를 기울였을 때 찾아질 수 있다. “감상”이라는 육중한 어휘에 어울릴 만큼의 질량을 갖춘 집중까지는 필요 없다 하더라도, 「Ch13」과 「Ch14」를 들어서 구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곡들이 놓여있는 맥락을 대략적으로나마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해줄 최소한의 주의가 필요하다. 요컨대 그저 멍하니 들어서는 그 둘을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1. 굳이 유래의 요구를 신경 쓰지 않더라도, 우리는 어떤 곡에서든 마음대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YR-TV』는 어떻게 듣든 순서가 중요한 앨범은 아니니까. 이 앨범에 정해진 입구 같은 것은 없다. 미리 결정된 입구를 없애버리기 위해, 유래는 1번 채널의 자리를 비워두었다. 『YR-TV』에는 「Ch01」이 없으므로, 어떤 트랙이든 “Ch01”이라는 이름이 수행하는 기능을 떠맡을 수 있을 것이다.
  2. T. W. 아도르노, 미학 이론, 홍승용 역, 문학과지성사, 1997(재판), 277-8쪽.
  3. 같은 책, 281쪽.
  4. 같은 책, 221쪽.
  5. 다소 극단적인 사례겠지만, 19세기 초 쇼펜하우어는 감상자가 미적 체험으로 넘어갈 때 “시간의 흐름이나 다른 모든 관계의 흐름에 제약받지 않[는다]”고 썼다. (A.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홍성광 역, 을유문화사, 2015(개정판), 327-8쪽.) 그에게서 시간의 흐름이 단절된다는 것은 곧 시간을 조건 짓는 일반적인 인지 규칙들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인데, 규칙들의 종속에서 해방된 미적 체험은 아주 특별한 관조로 상승한다. 이에 따라 시간을 단절시킨 미적 대상 (가령 작품 같은 것) 또한 가장 특별한 대상으로 상승한다. 그보다도 앞서 18세기 말 쉴러는 다음과 같이 썼다. “관찰(반성)은 대상을 멀리에 둠으로써 … 진짜로, 그리고 잃어버리지 않게 소유합니다. …… 감각 안에서 … 영원히 변화하는 시간 자체가 멈추어섭니다.” (F. 쉴러, 미학 편지, 안인희 역, 휴먼아트, 2012, 187쪽.) 그는 “오직 미적 상태만은 스스로 전체”여서 “우리는 여기에서만 마치 시간에서 벗어난 듯이 느끼게” 된다고 쓰며, 아름다움이란 자유로운 반성의 작업“이라고 쓴다. (앞의 책, 164/189쪽.)
  6. T. Adorno, On the Fetish Character in Music and the Regression of Listening; in The essential Frankfurt School reader(270p.-299p.), edited by. A. Araro and E. Gebhardt, The Continnum Publishing Company, New York, 1982, 286p.
  7. Ibid, 2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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