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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남, 『A Now』

0.

A NOW는 원래 송영남과 김슬비가 작업하고 스튜디오 콘크리트에서 전시했던 작품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나는 전시에는 가보지 못했다. 스튜디오 콘크리트는 A NOW가 “서울의 청각적인 이미지만을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3단계의 무브먼트를 통해 도시 내부의 삶의 모습을 라이브로 송출되는 사운드스케이프로써 작품 안에 투영”했으며, “마지막 4번째 무브먼트로 …… 서울의 이미지를 심포니 형식으로 완성”한 작품이라고 소개했다.1

『A NOW』는 도시 소음들을 담은 사운드스케이프에 앰비언트 사운드를 결합한 음반이다. 전시가 네 가지 단계들로 구성되었듯 앨범은 총 네 곡으로 이뤄져있다.

이 글에서 나는 ​『A NOW』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상반된 경향성에 대해 서술하면서 그 두 경향성들을 지난 세기의 서로 다른 두 가지 음악적 흐름과 연관지어보려 시도했다. 이 앨범에서는 20세기의 서로 다른 음악적 조류와 그 조류들 각각의 이념들이 부딪히고 있다. 이는 한 편에서는 규정적인 판단에 저항하는 동시에 반대편에서는 자신들을 규정지어보라고 부추기는 이 앨범 속 소리들의 이중성에 상응한다. 내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A NOW』가 청자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자기 스스로를 새롭게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이 앨범 속에서 상충하는 경향성들은 청자의 상상에 동력을 제공하고, 그럼으로써 ​『A NOW』에 역동성을 부여한다. 언뜻 듣기에는 정적이라는 인상이 들 수도 있지만, ​『A NOW』는 청자의 감상 속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음악이다.

 

1-ㄱ.

전시를 관람하지 못했으니 심포니 형식으로 완성되었다는 서울의 이미지가 어땠을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A NOW』의 네 번째 트랙인 「4 Weeks」가 전시 4주차에 대응하는 곡일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는 있지만(어쩌면 이것도 틀린 짐작인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이 트랙을 교향곡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일이다. 「4 Weeks」는 이상한 질감의 소음들을 재료로 삼고 있는 곡이기 때문이다. 다른 트랙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분명한 건반 멜로디를 가지고 있는 곡이기는 하지만, 「4 Weeks」는 교향곡이라고 부르기에는 사뭇 낯선 곡이다.

그러니 「4 Weeks」를 심포니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교향악의 개념 (곧 관현악단에 의해 연주되는 기악곡이라는 개념) 바깥에서 이 낱말을 이해해야할 것 같다. 심포니를 조금 더 넓게 이해하자면, 그것은 함께(sym-) 들리는 소리(-phony)들이다. 「4 Weeks」가 심포니라면, 그것은 이 곡에서 여러 소음들이 전자음이나 피아노 멜로디와 함께 어우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4 Weeks」를 (그리고 이 곡 뿐 아니라 『A NOW』를) 소음들의 심포니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2

“소음들의 심포니”라는 어휘는 셰페르 식의 명명법을 떠오르게 한다. 그는 온갖 기괴한 소음들을 이어 붙이고는 그 소음들의 콜라주에 생포니Symphonie라는 이름을 붙였던 사람이다.3 (아래에서도 적겠지만, 그렇다고 셰페르의 음악과 송영남의 음악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은 아니다.)

셰페르는 청자들에게 굉장히 특이한 청취방식을 요구했던 작곡가다. 그는 청자들이 자신의 작품 안에 녹음된 소리들이 어떻게 들리는가에 대해서만 주의하기를 바랐다. 가령 자동차 경적을 들을 때에도 자동차의 모습은 떠올리지 않으면서 그 소리의 청각적인 특질들에만 집중하길 바랐던 것이다.4

이런 한정적인 청취방식은 『A NOW』를 감상하는 데에 한 가지 대안적인 지침이 되어줄 수 있다. 서울의 청각적 이미지를 구현했다고 소개되어있기는 하지만, 굳이 이 앨범을 들으면서 어떤 지리적인 형태를 그려봐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 앨범에 녹음된 소리들을 두고 어디에서 나온 소리들인지를 유추하는 건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소리들을 통해서 공간적 관념들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요컨대 서울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여러 소리들의 다양한 음색들에만 집중하더라도, 이 앨범은 충분히 흥미로운 앨범이다. 『A NOW』에는 그만큼 다양한 음향적 질감을 가진 소리들이 담겨있다.

 

1-ㄴ.

사운드스케이프는 뜻이 애매한 단어다. 그것은 우리를 둘러싼 소리들의 환경을 통칭하기도 하고, 그 환경 안에서 들리는 것들을 녹음한 음악작품을 뜻하기도 한다. 사운드스케이프 음악에선 생활 세계 속의 주변적인 소음들과 배경음들이 작품의 질료가 된다. 이런 소리들은 예전에는 음악적인 소리로 인정받을 수 없었던 소리들이고, 다른 장르였다면 더 순도 높은 소리들을 추출하기 위해 제거했을지도 모르는 소리들이다.

어떤 소리가 더 음악에 어울리는지를 가려내는 일은 이제 무의미하다. 노이즈 음악 앞에서 음악적인 소리와 비-음악적인 소리를 구분하는 것은 퇴행적인 일이다. 《사운드스케이프》의 서문에서 쉐이퍼는 모든 소리가 음악적의 질료가 될 수 있으며, 나아가 소리가 단순히 그 자체만으로도 음악일 수 있다고 적는다.5 쉐이퍼는 일상적인 소음들이 루솔로에 의해 처음 음악적 질료로 사용되었던 때를 “청각의 역사에서 하나의 분기점”이라고 이르며 이렇게 쓴다.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름다움을 대신하게 되었다.”6 사운드스케이프는 다른 방식으로 소리들을 지각할 것을 요구하는 음악이다. 가령, 평소 같았으면 그저 흘려들었을 미세한 소리들에 자발적으로 귀를 기울이는 식으로.7 보잘 것 없던 소리들에서 특별한 감흥을 구하는 식으로.

이는 『A NOW』의 경우에도 그렇다. 때로는 성기게, 때로는 오밀조밀하게 배열된 소음들은 평소에는 집중하지 않았던 소리들에 감각을 곤두세우도록 만든다. 새로이 지각되는 소음들은 음악적인 소리-재료와 그렇지 못한 소리-재료 사이의 구분선을 지운다. 그리고 이처럼 소음들을 배열해 작품으로 제출하는 일은 예술적 과정과 비-예술적 과정 사이의 구분선 또한 지워놓는다. 그것은 소리들의 출처를 생각하지 않는 데에까지 뻗어가며, 모든 소리들이 집중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소리를 녹음한다는 것은 그 소리가 원래 놓여있던 맥락에서부터 그 소리를 떼어놓아 다른 맥락 속에 집어넣는다는 것을 뜻한다. 소리의 복제는 항상 그 소리들이 반복될 맥락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녹음은 단순히 소리를 옮겨 담는 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소리에 대한 가공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그 자체로 예술적인 과정일 수 있다. 설령 그것이 A NOW 전시처럼 녹음된 소리를 실시간으로 송출하는 과정이라도 그렇다. “소리의 포착은 녹음 이후에 벌어질 본격적인 …… 조작을 그저 기다리는 소극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이후의 조작 없이도 그 자체만으로 예술적 행위가 될 수 있다. 소리의 포착은 소리공간의 해석이며 구성이다.”8

물론 음악의 외연이 불분명해질 때까지 그 재료들의 범위를 넓혀가는 일은 이미 20세기 중엽 여러 급진적인 음악가들에 의해 수행되었던 일이고, 국내에서도 여러 음악가들에 의해 시도되었던 일이다. 하지만 음악적인 것과 그 반대의 것 (가령, 소음)을 구분하는 사고는 지금까지도 일반적인 견해로 남아있는 듯싶다.9 그렇기에 『A NOW』의 작은 소리들이 전달해줄 수 있는 충격은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을 것이다.

 

2.

물론 『A NOW』를 만들어낸 음악적 구성 작업은 단지 소리들의 녹음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 앨범의 소리들은 조직적으로 질서 지어져 있다. 그 질서가 가장 분명하게 느껴지는 트랙은 세 번째 트랙이다. 「3 Weeks」에서는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소음이 리듬악기로 기능하고 있다. 이는 마지막 트랙인 「4 Weeks」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이 곡에서는 아기자기한 소음들이 간헐적으로 튀어나와 박자를 잘게 쪼개곤 한다. 또 「1 Weeks」와 「4 Weeks」에선 비교적 또렷한 피아노 멜로디가 유동적인 리듬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A NOW』 속 트랙들 사이의 통일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구성해내는 요소는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전자음이다. 첫 곡에서부터 긴 호흡으로 지속되었다 그치기를 되풀이하는 전자음들은 『A NOW』를 앰비언트 음반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해준다. 이 앨범 속 음향들은 불길하고, 차갑고, 다소 기계적인 느낌으로 공기를 메운다. 비슷한 전례를 찾자면 바신스키의 『92982』를 꼽을 수 있겠다. 음량이 조금 더 작긴 하지만, 서늘하고 스산하게 미끄러져 들어오는 『A NOW』의 전자음은 바신스키가 연출했던 것과 비슷한 분위기로 청자를 휘감는다.10

『A NOW』가 가진 앰비언트적 특징들을 거론하면서 셰페르의 지침을 따르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앰비언트 음향들이 느릿하게 자아내는 분위기(또는 공기atmosphere)가 어떤 공간에 어울리는지를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앰비언트 장르에 대한 감상과 글쓰기에 있어 일반적인 관습인 듯하다. 가령 피치포크의 필립 셔번은 브라이언 이노의 『Ambient 1 : Music for Airports』가 “알루미늄과 유리의 반짝거리는 표면들로 햇볕이 쏟아지는 동안 무빙 워크에 올라 미끄러져가는, 참을성 있고 낙관적인 여행자들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고 쓴다.11 같은 매체의 케빈 로자노는 앞서 언급했던 바신스키의 앨범에 대해 글을 쓰면서 “침대에 누워 에어컨 소음, 자동차 경적, 나뭇잎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열려있는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그런 평범한 순간들”을 묘사한다.12

비슷한 방식으로 『A NOW』를 묘사할 수 있겠다. 첫 곡은 구겨진 채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밟는 듯한 소리와 새소리를 겹쳐놓으며 출발한다. 스쳐지나가는 바람소리가 섞이기도 한다. 피아노는 그 소리들 사이에 놓인다. 해가 뜬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아 새들만 지저귈 뿐 사람들 말소리는 들리지 않는 도로변에서 누군가 쓸쓸히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두 번째 곡은 보다 선명한 이미지와 함께 시작한다. 「2 Weeks」는 처음부터 곧장 비 오는 날 차량 교통이 정체된 도로를 그려낸다. 마지막 곡인 「4 Weeks」의 전자음에 대해서는 ‘물 위를 떠다니는 듯한, 또는 물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영상’ 같이 더 흔한 묘사를 덧붙일 수도 있겠다.

소리의 감각 그 자체에 대한 예민한 주의를 그 소리가 속해있을 법한 장소에 대한 관념으로 교체하는 것은 어쩌면 앰비언트라는 장르에 대한 정석적인 감상일 수도 있고, 『A NOW』에서 의도된 감상일 수도 있다. 브라이언 이노는 자신의 작업물에 앰비언트 음악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다음과 같이 적는다. “…… 앰비언트 음악은 생각하기 위한 공간…을 유도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 앰비언트 음악은 어떤 특수한 집중도를 강요하는 일 없이 청취-집중의 여러 단계들many levels of listening attention에 부응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흥미로운 만큼 무시될 수도 있어야만 한다.”13

「2 Weeks」를 들으면서 머릿속에 떨어지는 빗물이나 꽉 막힌 도로의 형태들을 그릴 때, 소리들에서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것들에 대한 집중력은 어느 정도건 낮아질 수밖에 없다. 일단 한 번 소리에 형태가 부여되고 나면, 그 형태에 들어맞지 않는 다른 특질들에 대한 느낌들은 주목받기 힘들게 된다. 소리를 둘러싼 공간의 상狀이 상상 속에서 더 분명하게 그려지는 동안, 소리 자체의 청각적 특징들은 주의를 벗어난다.

 

3.

여기에서 구체음악의 이념과 앰비언트 음악의 이념이 충돌한다. 셰페르의 음악을 구체음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소리들이 추상화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는 그 소리의 총체적인 감각적 구체성에만 온전한 집중이 쏟아지기를 바랐다. 반대로 이노는 앰비언트 음악에서는 소리들이 무시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적는다. 그리고 그 소리들에 대한 감각적 집중 대신, 다른 생각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적는다. 생각은 관념들을 다루는 활동이고, 관념은 추상화의 산물이다. 생각은 필연적으로 추상적인 활동이다.

소음들에 질서를 부여해 음악작품으로 구성한다는 것이 구체음악의 기획이긴 하지만, 『A NOW』는 결코 구체음악 작품이 아니다. 우선 소리의 높낮이가 또렷하게 느껴지는 전자음들이 적극적으로 쓰였다는 점에서부터 『A NOW』는 구체음악과 거리를 두고 있다.14 그리고 『A NOW』에 담긴 소음들은 구체음악가들이 테이프로 녹음했던 소리들보다 작고 미약하다. 하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차이점은 송영남이 요구하는 바에 있다. 앨범의 소개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15 “시각적으로 인식되어지는 풍경으로부터 소리를 음악적으로 재해석시킴으로써 우리에게 이 뒤섞여진 공간들이 어디에 속해져 있는 것인지 감상자의 생각대로 재구성하길 요구한다.” 송영남은 감상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상상 속에서 소리들을 그 구체적인 감각질들로부터 분리하여 임의의 공간적 관념들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재결합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고난이도의 추상적 작업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어떤 장소에서 어떻게 소리들이 울리게 되었고 녹음되기까지 이르렀는가에 대한 (허구적인) 추론을 수반한다. 그 추론이 실제 소리의 녹음/전달 과정과 일치하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송영남은 단지 “감상자의 생각대로” 그 추론이 이루어지기를 요구할 뿐이다. 추론은 자의적이어도 괜찮으며, 무엇보다 실제 녹음 과정을 알지 못하는 이상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추론 끝에 임의의 공간을 재현하는 시각적 형태를 마주치게 된다는 것이다.

셰페르는 “소리를 그 생산•전달 방식으로부터 떼어냄으로서 소리의 지각적 실재를 강조”하고자 했으며, 특히나 “눈에 보이는 것[과의] …… 어떠한 관계도 상징적으로 금지”하면서 청취에 시각적 상이 개입할 여지를 차단하고자 했다.16 그런데 소리들이 울리는 공간이 ‘어디에 속해있을지’를 생각 속에서 재구성하는 일은, “음악적으로 재해석”된 시각적 인식을 다시 시각화하는 작업을 수반한다. 가령 첫 트랙의 새소리를 들으면서 어딘가 산골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면, 자연스레 산골짜기의 나무들과 가지 위에 앉아있는 새의 모습을 그려보게 될 것이다. 이 앨범의 자켓 사진은 그러한 재-시각화 작업의 훌륭한 예시를 보여준다. 검은 색의 작은 얼룩들과 얇은 곡선들 가운데에 놓여있는 것은 『A NOW』의 분위기에 맞게 다시 그려진 서울이다.

소리들은 묘사됨으로써 추상되고, 규정됨으로써 설명된다. 가령, “「2 Weeks」의 인트로에선 비가 쏟아지는 차도의 소음들이 들린다.”라고 진술하는 식으로. 『A NOW』가 그려내는 풍경이 생생해질수록, 소리들이 속해있을 법한 공간이 눈에 선해질수록, 소리들의 구체적인 느낌은 그만큼 주의를 벗어나게 된다.

 

4.

그렇다고 『A NOW』의 소음들이 그렇게 순순히 생각들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은 아니다. 그 소리들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한다. 「1 Week」의 첫 부분부터 들리는 소리들은 어떤 소리인가? 어떤 형용사들을 동원하더라도 그 소리들이 주는 느낌을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소리들이 전달하는 느낌은 그만큼 특이하다. 「4 Weeks」의 전자음이 부유하는 듯한 (또는 침잠하는 듯한) 영상을 떠올리게 한다는 진술은 이 곡에 대한 충분한 설명일 수 없다. 그 주위에서부터 잘그락대는 소음들이 계속해서 끼어들어오기 때문이다. 잘그락댄다고 적긴 했지만, 이것도 충분한 형용사일 수는 없다. 그 소리들의 질감은 잘그락댄다는 형용사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복잡하다는 것은 여러 특징들이 한꺼번에 느껴진다는 것이며, 그만큼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추상화는 특징들을 제거해나가는 작업이다. 필요한대로 제거하고 남은 몇 가지 특징들에 대한 묘사만으로는 『A NOW』 속 소리들의 음색을 설명할 수 없다. 곧 그 소리들은 추상화되기를 거부한다.17

그러나 소리들이 소속될 만한 공간을 시각화해 볼 기회가 완전히 차단되는 것도 아니다. 『A NOW』는 소리들이 어디에서 그리고 어떤 상황 속에서 녹음되었는가에 대한 상상을 금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A NOW』는 때때로 그 소리들에 어울릴 만한 장소를 그려보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앞서 적었던 「2 Weeks」의 인트로처럼 그 음원이 꽤나 쉽게 시각화되는 소리들도 꽤 있다. 나아가 앰비언트 음반으로서 『A NOW』는 각 곡들에 고유한 분위기들을 가지고 있고, 그런 분위기가 어떤 공간을 어떻게 채우는가에 대한 상상 또한 허용한다.

다만 그 상상 끝에 도달하는 규정은 어떤 경우에든 불충분한 것으로 남는다. 소음들의 음색을 설명할 수 없는 까닭에, 그 소리들의 질감이 때로는 묘사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한 까닭에, 소리들에 대한 생각은 언제나 미완결로 남는다. 『A NOW』를 채운 소리들에 대한 규정들의 효력은 일시적일 뿐이다. 그것들은 언제나 기각될 수 있으며, 실제로 여러 소음들의 구체성에 의해 수시로 기각된다. 소음들은 각 규정들의 예외로서 튀어나온다. 「2 Weeks」의 경우, 가끔씩 울리는 자동차 경적이 차도의 모습을 그려보도록 부추긴다. 하지만 동시에 그 주위에서 울리는 소음들은 차도의 이미지를 흩트린다. 어떤 소리는 너무 둔탁하고, 어떤 소리는 높게 딸깍이는 소리를 낸다. 이런 소음들은 어쩌면 기계실 같은 곳에는 어울릴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차도와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이 소음들 때문에 “차도” 같은 관념들은 「2 Weeks」의 소리들에 대한 확정적인 답안으로 결정될 수 없다. 그런 관념들로는 이 곡을 일관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미세한 소음들이 규정에 저항하는 순간들이다. 색다른 질감의 소음들은 앨범 곳곳에서 듣는 사람의 감각을 곤두서게 하고, 소리 자체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것들은 마치 귀를 긁어대듯이, 또는 귀에 부딪혀오듯이 청각을 자극한다. 그때 그 소리들은 내가 그것들을 생각해온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내가 내린 규정들을 거부한다. 소리들에 대한 생각은 완결될 수 없다. 소리들에 대한 답이 주어질 수 없기 때문이며, 소리들이 전달하는 복잡한 느낌이 어떤 식으로도 충분히 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 끝에 제출된 답안들이 연거푸 거부당하는 와중에도, 얄궂게도 『A NOW』는 계속해서 다시 생각해보라고 권유한다. 조금 더 유추하고 규정하기 쉬운 소리들(가령 「3 Weeks」에서 박자를 맞춰가며 반복되는 증기 소리들)을 건네어주면서, 다시 임의의 공간을 상상하도록 부추긴다. 한 생각이 완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다른 생각들에 열려있다는 것이다. 『A NOW』는 복잡한 질감의 소음들을 통해서는 생각을 끊어놓고, 더 쉽게 시각화될 수 있는 소리들을 통해서는 그 생각을 다른 생각으로 이어가도록 만든다. 끊고, 다시 잇기. 이로써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문다. 상상은 끝나는 일 없이 반복된다. 소리들은 가능한 여러 공간의 관념들과 끝없이 재결합되게 되고, 이에 따라 감상은 계속해서 재구성된다. 소리들에 대한 생각이 그 중 한 관념에 달라붙어 있을 때면, 어김없이 소음들이 청각을 자극하며 그 생각을 끊는다. 그리고 다음 차례에는 다시 다른 공간의 관념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다시 생각이 끊기고, 다시 다른 공간을 떠올려보고……. 상상은 이런 식으로 계속되며 멈추지 않는다.

이처럼 ​『A NOW』의 소리들은 이중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 소리들은 한편으로는 형태를 가지기를 거부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자신들에게 형태를 부여해보라고 부추기기도 한다. 첫 번째 방향성은 두 번째 방향성이 완결되지 않고 계속될 수 있도록 해준다. 소리의 형태가 생각 속에서 완성되고 나면, 그 소리에 대해 상상해 볼 수 있는 다른 형태들은 머릿속에 떠오를 기회를 잃는다. 한 소리가 하나의 상에 고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A NOW』 속의 저 규정하기 힘든 소음들은 소리들에 부여된 형태들을 계속해서 허물어간다. 이 덕분에 소리들은 특정한 상에 고정되는 일 없이 다른 형태들과 대조되어 볼 기회를 얻는다. 『A NOW』의 소음들은 생각을 방해하는 동시에 생각을 자극한다. 형태는 완성되지 않고, 다만 완성되기 이전의 흐릿한 윤곽 같은 것들만이 계속해서 제시되고 사라지기를 거듭한다.

다른 앰비언트 앨범들이 으레 그렇듯, 어쩌면 이 앨범은 다소 단조로운 듯이 들릴지도 모른다. 건반의 노트수도 많지 않고, 그 곁에 놓인 소음들의 크기도 작기 때문이다. 하지만 『A NOW』는 청자의 감상이 어느 한 방식에 체류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감각을 일깨우고 상상을 촉발한다는 점에서 역동적이다. 『A NOW』의 소리들은 듣는 이의 느낌과 상상 속에서 꿈틀거리며 부단히 새로워진다. 출력 장치 너머로 펼쳐지는 스산한 공기, 갖은 소음들의 야릇한 질감, 그리고 듣는 이의 감상을 그 내부에서부터 환기시키는 이 독특한 역동성. 이것들이 『A NOW』의 강점이다.

  1. http://www.studio-ccrt.com/xe/board_YZMc13/239499. 2019년 3월 12일 확인.
  2. 재밌게도, 초기 교향악은 오페라 극장의 공연이 시작되기 전 극장 안의 소음을 잠재우기 위해 연주되었다고 한다. 최은규, 교향곡, 마티, 2017, 19쪽에서 21쪽까지 참조.
  3. 실제로 셰페르는 소음들의 교향악Symphonie de bruits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Symphonie_pour_un_homme_seul. 2019년 3월 15일 확인.
  4. 김진호, 매혹의 음색, 갈무리, 2014, 58쪽 참조.
  5. “나는 이 책에서 세계를 대우주의 음악작품으로 다룰 예정이다.” M. 쉐이퍼, 사운드스케이프, 한명호•오양기 역, 그물코, 2008, 17쪽. 같은 쪽에서 그는 20세기 중엽 음악의 정의가 변화했음을 지적하며 케이지를 인용한다. “음악은 소리이다. 콘서트홀 안이든 밖이든 우리를 둘러싼 소리이다.”
  6. 같은 책, 182쪽.
  7. 이승린, 〈도시의 사운드스케이프와 실험음악에 감각적으로 참여하기〉; 《HETEROPHONY #2》 41~51쪽, 헤테로포니, 2019 참조. 이 글에서 이승린은 로레인 플로어드를 따라 일본 온쿄 음악의 사례에서 소리를 접하는 방식이 주의하지 않은 채 소리를 받아들이는 듣기hearing에서 작은 소리들에 자발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며 감각을 환기시키는 청취listening로 변화해갔음을 강조한다. 온쿄는 비의도적으로 발생하는 도시 소음들의 침투를 허용하며 즉흥적으로 연주되는 전자음악과 그 음악의 청취 방식을 뜻하는 낱말이다.
  8. 김진호, 매혹의 음색, 갈무리, 2014, 326쪽 참조.
  9. 노이즈 음악이 국내에 소개되어온 과정 및 소음이 국내에서 예술적 재료로서 재인식되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이승린, <1990년대 이후 국내 노이즈 음악의 위상과 질적 변화에 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연세대학교, 2017, 5쪽에서 11쪽 참조. 이승린에 따르면 2000년대를 지나면서 노이즈 음악은 미술관에서 전시되는 사운드 아트로 알려졌으며, 미술관 밖에서 연주되는 자율적인 음악 장르로서 노이즈 음악의 정당성은 아직까지도 충분히 인정되고 있지 못하다. 그는 노이즈 음악의 예술적 정당성이 국내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로 노이즈 음악에 대한 담론의 체계가 탄탄하지 못함을 꼽고 있다.
  10. 의도된 것은 아니겠으나, 『A NOW』와 『92982』 모두 1부터 4까지 번호가 메겨진 네 곡의 트랙들로 구성되어있다.
  11. https://pitchfork.com/features/lists-and-guides/9948-the-50-best-ambient-albums-of-all-time/?page=5. 2019년 3월 12일 확인.
  12. https://pitchfork.com/reviews/albums/22277-william-basinski-92982/. 2019년 3월 12일 확인.
  13. http://music.hyperreal.org/artists/brian_eno/MFA-txt.html. 2019년 3월 12일 확인.
  14. 셰페르는 소리의 높낮이에 대한 느낌이 소리의 다른 특질들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가령 음색 같은 요소들에 주의하지 못하도록 만듦으로써 소리를 추상화한다고 생각했다. 김진호, 매혹의 음색, 갈무리, 2014, 59쪽 참조. 같은 책의 서문에서 소음은 음고 느낌이 분명하지 않은 소리로 정의된다.
  15. http://poclanos.com/station/a-now/. 2019년 3월 12일 확인.
  16. 서정은, <보이는 소리, 보이지 않는 소리>, 《음악논단》, 제40집, 2018, 110쪽과 111쪽에서 재인용. 앞서도 적었듯 셰페르는 소리들의 원인이 의식되지 않기를 의도했다. 본문에서는 다루지 않았으나, 이 논문의 저자인 서정은은 구체음악에 대한 셰페르의 기획에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첫 째, 음원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곧 음원이 식별되지 않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둘째, 음원이 보이지도 식별되지도 않는 소리는 오히려 구체성을 결격한 소리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인용한 논문의 2장 2절 참조.
  17. 이와는 반대로, 소리들의 질감이 가지는 복잡성에 대한 강조가 오히려 구체적 청취를 방해할 수도 있다. 국내의 노이즈 음악 장르의 첫 세대 음악가인 홍철기는 헤테로포니에 게시된 이승린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이즈 음악을 들을 때 경험이란 건 소리를 못 듣는 것 아닌가요? 노이즈 음악이 가지고 있는 어떤 복잡한 텍스처를 들을 수도 있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노이즈 음악은 다른 걸 다 못 듣게 만들잖아요.” (http://heterophony.kr/2017/12/03/chulkihong/. 2019년 3월 13일 확인.) 곧 노이즈 음악을 들으며 소리들의 질감에 집중할 때, 오히려 다른 특징들을 추상하게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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